"지금 고객님을 응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고객 응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흔히 접하게 되는 문구다. 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불편했다. 이 말을 보고 들을 때마다 소외감, 고립감,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전형적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가족 안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가족 안에서 차별, 배제, 폭력을 경험하는 사람들, 살아남기 위해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원하는 사람들,...이 문구를 접할 때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족'의 상실, 결핍을 경험한 사람, 이제 사람과는 더 이상 '소중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사람과는 '인간적 교감'을 좀처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에서만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고받는 사람들,.... 이 문구를 접할 때마다 그런 사람들이 '고귀함'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 가족 안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귀한 존재라는 것. 그것은 분명 인간이 타인의 존엄성을 정동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 중 하나다.
그러나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으로 살아본 경험은 타인을 존중하는 능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기반이 아니다. 누군가는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누군가는 사람이 아닌 동물로부터 '가족 같은 경험'을 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아닌 자연 속에서 '소속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얻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다른 인간과 동물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누군가의 가족=소중한 존재'라는 프레임은 사람들이 누구나 '전형적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가족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가족 신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등급을 나누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말은 가족을 기준으로 귀한 인간과 천한 인간으로 나누는 말, 그렇게 자본주의 신분 질서를 견고히 하는 말이다.
서비스 노동자를 대할 때 상대방이 '누군가의 가족'임을 떠올려야 그 사람이 소중한 존재라는 정동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전제,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 사람은 가족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그냥 귀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