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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현 Jul 30. 2022

나의 세 번째 <녹비홍수> 잡설

올해 맡은 제일 큰 프로젝트의 용역 원고를 탈고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관심즉란 작가의 <서녀명란전>을 극화한 73부작 시대극 <녹비홍수> 복습이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늘 그랬듯이 관심 포인트 중심으로 스킵하면서 보았다. 바쁜 일과 속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고 긴 장편 중국 드라마를 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 장편 드라마의 특성상 최소 20편을 넘어가면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폭발하면서 엄청한 흡입력을 갖는데, 이 드라마도 그렇다. 이번 완주에서 중반 이후에 나도 모르게 30분마다 '와! 재밌다'를 거듭 외쳤다. 무려 세 번째 보는데도 그랬다. 아니, 이번에야말로 진정 이 드라마의 재미를 제대로 맛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 완주할 때는 주인공의 연애사 중심으로, 두 번째 완주할 때는 사고 치는 인물들 중심으로, 이번에는 악역 인물들에 몰입하면서 보았다. 흔히 중국 시대극의 악역 캐릭터는 스케일이 남다른 악행을 일삼는데 이 드라마의 악역들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번에 완주할 때 악역 인물들의 그러한 인간성을 장착하게 된 이력과 배경, 즉 '맥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맥락에서 보면 드라마 속 악당들은 '타고난 괴물'이 아니라, 가부장제 신분제 계급사회에서 각자 '한 번의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악한 인간'으로 '동기화된/형성된 존재'로 보인다. 


이번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속 악당들을 '절대 악'이 아닌 각자의 생존 서사를 가진 숱한 인물들 중 하나로 보게 된 것, 이런 관점의 전환을 경험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이런 신분제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에서 '선과 악'이란 '적응'이라는 절댓값을 기반으로 설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우여곡절 끝에 잘 적응한 자는 도덕성을 가져가고, 적응에 실패한 자는 도덕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볼 때에는 드라마 속 선한 캐릭터에 동일시했지만, 시청을 거듭하면서 그 관점에서 벗어나면서 드라마 속 악역 캐릭터에 주목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더 구체적이고 심도 깊게 묘사될 것 같아 읽어보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읽고 싶은 장편 소설(총 16권!, 심하게 장편이다! ㅜㅜ) 하나 못 읽는 삶을 살 필요가 있겠나 싶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재미있는 거 하면서 살아야지. 


최근 몇 년 동안 몸과 마음이 컴퓨터가 맛이 가듯이 '뻑나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한~두 달 가다가 그 기간이 점점 길어졌고 주기도 짧아졌다. 그러다가 올 스톱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아직도 회복 중이다. 내가 이렇게 '뻑이 난 것'은 재미있는 것을 못하고 살아서 그렇다. 재미와 여유의 결핍이 깊어지면 이렇게 올스톱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나의 세 번째 <녹비홍수> 감상 요약은요, 


가부장제 신분제 사회의 타자들이 쫄깃하고 파워풀한 악당으로 출현하는 서사. 드라마 속에서 대부분의 악당은 멸종되지만, 어떤 악당은 살아남는다. 드라마가 어떤 악당을 살려주는 방식, 가족주의 프레임인데 아마도 원작이 극화되면서 제작진이 타협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론은요, 원작을 봐야 해, 원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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