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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현 Aug 17. 2022

'독신 귀족'과 사회 소득

바버러 쿠니, <미스 럼피우스>

"아이들과, 뱃사람들과, 처녀들의 수호 성인인 성 니콜라스께 바칩니다."


바버러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는 비혼 여성 주인공 미스 럼피우스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성 니콜라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아이-뱃사람-처녀, 연결 지점이 잘 상상이 안 되는 존재들을 보호해 주는 성인이라니, 어쩐지 호기심이 생긴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앨리스'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다. 이민자 3세인 주인공은 생활 장식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로부터 삶의 가장 큰 영감을 물려받는다. 먼 곳으로의 여행, 바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이 그것이다.


주인공의 인생 기획은 평소 동경하던 것을 다 해보는 것이다. 주인공은 어른이 된 후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사서'로 일하고, 중년에는 '이국적인 곳'으로 여행을 하고,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바닷가 집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동네를 자기가 좋아하는 꽃으로 가득한 장소로 바꾼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에서 보석 같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나눠주며 말년을 보낸다.


독신 귀족...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고향 친구와 함께 살았는데, 주말에 친구랑 가끔 브런치를 먹으러 가던 카페가 있었다. 중년 여성 둘이 운영하던 그 카페 이름이 "독신 귀족"이었다. 여러모로 세상살이가 참 팍팍하던 시절이었는데, 카페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그곳을 찾곤 했다. 현실은 빛이 잘 들지 않는 원룸 자취 생활에, 과외와 학원 강사로 근근이 생활했지만, '독신 귀족'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면 세상에 굴하지 않는 자존감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독신'과 '귀족'의 조합이라니, 짜릿하게 마음에 들었다.


이 책 <미스 럼피우스>를 읽고 나서, 그 카페 이름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았던 비혼 여성 주인공 미스 럼피우스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신 귀족'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런저런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미스 럼피우스가 '독신 귀족'까지는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조건이나 배경을 짚어보게 된다. 주인공이 비혼 독신 여성으로서 그렇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자기 충족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데 몇 가지 중요한 소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 소득 social income'이다.


'사회 소득'이란 돈이라는 금전적 형태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제적 안정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형태의 소득의 총합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사회 소득과 불안정성>(Guy Standing 외, 2010)에 따르면, 사회 소득은 6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1. OP - 자가 생산, 직접 생산한 먹을거리, 재화, 서비스

2. W - 화폐 임금

3. CB - 가족/친족/지역공동체가 제공하는 원조금

4. EB - 기업 수당

5. SB - 국가 수당

6. PB - 저축과 투자에서 나오는 사적 수당 + 유무형의 사회적 교환, 신용, 빚


<미스 럼피우스>의 주인공은 이민자 3세로서, 경제적으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서민층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책의 앞부분에서 주인공 할아버지를 '예술가'로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 직업은 생활 소품을 만드는 자영업자다. 주인공에게 가장 큰 사회 소득은 가족, 친족, 지역공동체에서 제공되는 금전적, 정서적, 관계적 자원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젊은 시절 일정 기간 동안 일했던 '사서'라는 직업만으로는 여행 경비, 집 매매 비용, 노년기 생계비를 충당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종주의-제국주의 배당금'이다.  


<미스 럼피우스>의 주인공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독신 여성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살았다. 책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으로 짐작된다. 그 시절 독신 여성이 자기 충족적, 자립적 삶을 사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독신 여성이 여기저기 해외여행을 다니고, 가는 곳마다 환대받고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이 '백인'이었기에 가능했다. 먼 곳까지 가서 여러 곳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고, 인간으로서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인종차별과 제국주의로 인해 미국의 백인이 누리는 수많은 혜택 중 하나다.


<사회 소득과 불안정성>(Guy Standing 외, 2010)의 주제는 '사회 소득'의 분배가 다양한 유형의 수당(benefits)에 대한 접근성과 그 계급 구조에 따라 어떻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핵심 문제의식은 사회 소득의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개인/가족/공동체의 불안정성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의 주인공을 '사회 소득'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소득과 불안정성>(Guy Standing 외, 2010)의 저자들이 제시한 6가지 항목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인종 차별과 제국주의로 인해 백인이 누리는 혜택이다. 이것을 개념화하자면, '인종주의-제국주의 배당금' 또는 '인종주의 수당 benefit'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문화 분석을 하자면, <미스 럼피우스>의 주인공이 비록 독신 여성으로서 가부장제 배당금을 분배받지는 못했을지언정, 경제적, 문화적으로 '인종주의 수당'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에 '독신 귀족'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인종주의 혜택을 보는 백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누리는 혜택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스 럼피우스>에는 인종적 다양성이 보이지 않는다. 딱 한 장면에서 아시아계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 외 등장인물은 모두 백인이다.


한편, 어떻게 개념화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서 가부장제의 타자, 여성에게도 강점이 있다. 돌봄을 주고받는 느슨한 인간 관계망 형성 역량이다. 그래서 여성은 '비혼' 또는 '독신'으로 살아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그것에 비해 한국 남성은 여전히 여성에게 절대적 의존자로 남아있다. 거기서 벗어나야 남성들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최근 그러한 삶의 형태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콘텐츠가 많아지고 있어 다행이다.


어쨌든, 독신만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이 있다.


어쨌든, '독신 귀족'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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