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뭔가 있어요!

라이언의 딸 (Ryan's Daughter, 1970)

by 권수현

로지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지극히 사모하여 눈물로 사랑을 고백한 끝에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된 중년의 선생님과 결혼하지만, 결혼 첫날밤부터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조바심에 가까운 일종의 허기같은 불만족 상태에 이른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며 거닐던 해변가에 돌아온 그녀는 알 수 없는 불행감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성급한 발걸음을 멀리서 지켜보던 신부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Father Collins: 로즈, 어디가니?
Rosy: 아무데도요.
Father Collins: 서두르는구나. 찰스와 무슨 문제가 있니?
Rosy: 아뇨.
Father Collins: 행복하니?
Rosy: 모르겠어요.
Father Collins: 왜지? 말해보렴
Rosy: 제가 멍청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인데다가 은혜를 몰라서 그래요.
Rosy: 전 원하는 걸 모두 가졌잖아요?
Father Collins: 그렇지. 더 이상 무엇을 원하니?
Rosy: 모르겠어요, 신부님.
Father Collins: 거짓말이야.
Rosy: 아니에요.
Father Collins:
Rosy: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더이상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Father Collins: 좋은 남편이지?
Rosy: 최고죠.
Father Collins: 많진 않지만 충분한 돈이 있지?
Rosy: 네.
Father Collins: 아픈데 있니?
Rosy: 아뇨.
Father Collins: 그럼 됐잖아! 이 버릇없는 녀석아!
Rosy: 하지만 뭔가 있어요.
Father Collins: 아니야!
Rosy: 분명히 있어요, 신부님!
Father Collins: 왜지?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거야? 네가 더 원하기 때문에?
Rosy: 맞아요.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암튼 그때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로지와 영국인 장교가 처음 몰래 만나 말을 타고 동화 속 그림 같은 숲으로 들어가 섹스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지난 주에 다시 보았을 때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직 그 장면, 두 젊은 남녀의 떨리고 긴장된 몸짓들 중간에 잠깐 잠깐 보여주는 숲이 우거진 하늘, 처녀림의 풍경들, 개울물, 그리고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다 날아가는 그 장면만은 마치 사진으로 본 것처럼 똑똑히 기억이 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나이가 영화 속 여자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본 것 같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유독 그 장면 만을 기억한 것은 그 나이 때의 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40이 다 되어 다시 보니, 마음이 찢어지게 사랑해서 선택한 남편이고, 스스로 좋아서 한 결혼이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새댁의 혼란과 불행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에서 콜린스 신부와 나누는 대화, 자상한 남편, 넉넉한 살림살이, 건강한 신체...인간 행복의 절대 조건을 다 갖추었지만 불행하다고 항변하는 로지에게 콜린스 신부가 더이상 무엇을 원하냐고 하니까 "모르겠다, 더 이상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는가?"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그녀가 이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로지처럼 10대 아니라 20대에 결혼했어도 그녀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태어나 오직 아일랜드 해변에서만 살았던, 그 해변과 마을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녀처럼, 자신이 아는 세상도 그다지 넓지 않은 사람에게,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라는 가곡을 들을 때 느껴지는 감정처럼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설레임과 호기심, 산 넘어 남촌에 한번 가보고 싶은 욕구는 결혼 속에서 곧바로 구속과 불행으로 경험될 것이기에.

이제 막 뭔가 알 것 같은 그래서 더욱 불타오르는 욕망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로지에게 콜린스 신부는 "너무 걱정 말아라. 소원이 없을 순 없지만 더이상 키우지는 말아라. 그러다보면 소원이 이뤄질게다."라고 애써 충고하지만, 아마 신부조차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이 미션 임파서블이 될 것 같은 예감을 가졌을지도.


암튼, 난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에 결혼 일찍 하는 거 정말 반대!!!


2006년 7월 16일에 씀.


영화 정보 :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752919&qvt=0&query=%EB%9D%BC%EC%9D%B4%EC%96%B8%EC%9D%98%EB%9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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