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아이들의 시간(1936, 1961)

by 권수현
1961년 시놉시스 http://imdb.com/title/tt0054743/plotsummary

A private school for young girls is scandalized when one spiteful student, Mary Tilford, accuses the two young women who run the school of having a lesbian relationship.

한 한생이 학교 운영자인 젊은 여선생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고 고발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다니는 한 사립학교에서 스캔들이 발생한다.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관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아이들의 시간(1961)은 윌리엄 와일러가 1936년에 만든 릴리언 헬먼의 원작(The Children's Hour)을 영화화한 "These Three"를 1961년에 리메이크한 것이다. 오드리헵번 주연의 이 영화를 본 후에 영화 관련 정보를 찾아보다가 그런데 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1936년의 시놉시스와 1961년의 그것이 사뭇 다르다는 것.


흥미롭지 않은가. 36년에는 연인 사이인 카렌과 조 사이에 조와 말타 간의 스캔들이 문제였다면, 61년에는 카렌과 말타 간의 스캔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문제의 중심이 혼전 성관계와 이성애 삼각 관계에서 여성간 동성애로 바뀐 것이다. (1936년에 카렌 역을 맡았던 미리엄 홉킨스가 1961년 영화에서는 스캔들을 퍼트린 릴리 여사 역을 맡았다. 이래 저래 당대의 문제적 작가였던 원작자 릴리언 헬만의 이력도 사뭇 매력적이다. 내가 한때 매료되었던 영화 [줄리아]의 원작자이다. 릴리언 헬만 작가는 '두 여자와 한 남자' 관계 구도를 자주 다뤘다.)


어.쨌.든.


이래 저래 심사가 몹시 불편했던 날, 이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에 좀 울었다. 1961년 영화에서는 말타가 자살하거든. 마지막에 말타의 장례식날, 말타의 무덤 앞에서 꽃을 놓고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렌이 당당하게 마을을 떠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카렌 역을 맡은 오드리헵번은 뭔가 고상한 아우라를 풍기는데, 오드리 헵번 특유의 이 고상한 아우라와 당당하게 마을을 떠나는 장면에서 뭔가 복잡미묘한 것을 감지했다. 말타가 카렌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순간, 결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카렌, 오랫동안 자신도 몰랐던 비밀스러운 감정을 격하게 털어놓은 말타의 방을 떠나면서 다만 같이 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정착하자고만 말하던 카렌, 그 카렌 역을 오드리 헵번이 맡았기에 아마도 이 영화가 보수적이었던 61년 미국 사회에서 그 다지 큰 반격을 받지 않았을수도 있지 않았겠나 싶네. 오드리 헵번은 뭘 해도 품격이 있거든.


그래서 한편으로는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얄미움의 대상이 오드리 헵번인지, 아니면 영화 속 카렌인지 헷갈리지만...말타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자기 감정을 털어놓았을 때, 그 가장 여리고 취약한 속내를 드러내었을 때, 카렌은 그 말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다, 싫다, 나는 아니다, 잘 모르겠다, 헷갈린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 그냥 친구 사이로 남자!", 등등 뭐라고 반응을 했을 법 한데, 카렌은 그 말 자체에 대해서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같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카렌은 말타의 고통스런 고백을 듣고도, 모른 척, 못 들은 척, 그야말로 '생깠던' 것. 아마 내 생각에 말타가 자살한 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물론 동성애가 변태 또라이 취급을 받던 (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카렌이 그 말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쉽지 않았을 것임. "같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아마도 이 말은 자신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었을수도.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말은 "나도 너한테 마음이 있다" 혹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이런 걸로 읽히지는 않거든. 오히려 의리나 그동안의 우정을 고려한 최선의 예의로 들렸을 수도 있거든. 바로 그것 때문에 말타가 상처받았을 것 같거든. 차라리 자신의 고백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직접적인 반응을 보였더라면, 연인의 감정을 품은 자신을 승인한 것이었을텐데, "우리 다른 곳에 가서 살자"? 이건 영 동문서답이거든. 연인의 감정을 고백한 말타는 카렌에게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야. 이게 말타를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근데 말야, 자신의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은 채, 고귀한 품격을 유지하는 그 카렌 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 말야, 그래서 좀 미묘한 느낌을 받았어. 뭐라고 할까, 실제로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 나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게다가 오드리 헵번은 품위까지 있잖아. 그러니 얼마나 얄밉냐.


원작의 내용은 도대체 36년 버젼일까? 아니면 61년 버젼일까? 그게 몹시 궁금하단 말이지. 학교 도서관에 찾아봤더니, 이 책이 없더만. 그래서 구입 도서 목록에 신청할까 하다가 말았어. 누가 이 책을 볼까 싶어서. 쓰고 나니까 더 궁금하네 그랴. 아마도 원작은 36년 버젼이 아닐까 싶네. 61년에 리메이크 하면서 릴리언 헬먼이 시나리오를 재구성한 것으로 보임.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같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이 말은 어떤 시대에는 충분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을 보여주기에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더 많은 말을 해야 되는 때가 있는 법이다.


2007년 12월 30일에 씀.


영화 정보 :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766862&qvt=0&query=%EC%95%84%EC%9D%B4%EB%93%A4%EC%9D%98%20%EC%8B%9C%EA%B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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