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하는 자의 나르시시즘

2008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특급호텔 (Hotel Splendid)

by 권수현

재현하는 자의 나르시시즘 : 진실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다


2008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특급호텔’(Hotel Splendid)


동료 중에 군위안부 연구자가 추천하길래 같이 가서 봤는데, 함께 간 친구에게 참 미안했지만 도저히 끝까지 볼 수가 없어 1부만 보고 2부는 끝내 볼 수 없었다. 잔인한 장면에 유달리 취약한 나의 심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감수하고까지 그 연극을 견딜만한 어떤 질적 깊이가 담보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인이, 동아시아 식민지와 태평양 전쟁에 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서양인이, 그것도 당시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이후 세대의 사람이 군위안부 문제를 과연 어떻게 재현할지 사실 조금 의문이었다.


연극은 처음부터 배우들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시종일관 '잔혹한 기억'의 재현으로만 진행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일상과 경험은 온통 '고통'에 관한 것으로 점철되었고, 그 재현 방식은 사뭇 주로 납치와 일본군의 가해 행위를 묘사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비극적인 것만을 모으고 모아 재현한 것 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으나, 그 재현 방식이 몹시 불쾌했다. 성적 행위에 대한 재현의 내러티브의 잔혹성은 피해자가 느꼈을 심리적, 신체적 고통에 대한 몰입과 상상과 마치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에서 등장할 것 같은 묘한 포르노적 가학성의 상상력과 감성이 서로를 자극하며 혼재되어 있었다. "특급 호텔"이라는 연극 체험을 한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하겠다. 적어도 나에겐 고문이었고, 나는 그 고문을 견디지 못해 2부가 진행되는 내내 바깥에서 동료들이 관람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식민지 조선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되어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무학의 식민지 조선 여성들이, 그것도 전쟁터에서 군위안부로 고립되어 감금 생활을 하고 있는 어린 여성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았을 리도 만무하지만, '미국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작가의 생각은 터무니없다는 것이 함께 연극을 본 사람들의 지적이었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인 작가의 내러티브는 "불쌍하고 고통스러운 타자=식민지 조선/천인 공로할 악마성을 발휘한 가해자=일본군", 그리고 악마로부터 피해자를 구원해줄 미국이라는 제삼자의 삼각 구도에 의거한 구원 서사가 내재되어 있었다. 구원의 주체(미국, 미국인 작가)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선인 군위안부는 최대한 고통스럽고 불쌍한 사람으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야 했고, 그런 방식으로 재현된 인물들의 모습은 오로지 '피해자/가해자' 구도로만 환원되어 그려졌다. 마치 복잡하고 다층적인 한 인간의 삶에서 오로지 '성적 가혹 행위 장면', 그리고 그것이 피해자의 삶 전반에 미친 영향 중에서 오로지 '고통'이라고 불릴 만한 것만을 골라 뽑아내어 바로 그것이 '군위안부'의 존재라고 명명했다고나 할까. 마치 어떤 사람을 표백하여 한 가지 색깔만을 남겨놓은 것 같았다.


물론 일본군 군위안부가 일본 정부가 저지른 조직적 성범죄였으며, 물리적 강제, 기만, 선동에 의해 동원된 여성들이 겪은 고통은 극심한 것이었고, 학문적으로는 물론 예술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재현'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특히 폭력 문제를 재현할 때에는 그 누군가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재현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군위안부 서사에서 그 사람이 일본군에게서 겪은 물리적, 정신적 '고통'에 관한 것만을 듣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 고통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그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군위안부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너무나 고통과 분노의 서사에 함몰되어 있어, 그 서사 만으로도 자기 충족적이고 순환적인 구조를 갖는 듯했다. 숱한 기억들 중에서 고문의 기억만을 가진 존재, 억압과 착취의 흔적만을 지닌 존재,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만들어낸 군위안부라는 재현물의 모습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나온 동료들은 작가가 연극을 보면서 울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내러티브에서, 그것이 만들어낸 상상적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눈물, 슬퍼하는 그의 행위에서 어쩐지 군위안부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가 와닿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심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작가의 분노, 그의 눈물이 내겐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 앞에서 보이는 자기도취적 감상 행위로 비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이다.
The enemy of Truth is not falsehood, It is forgetfulness.


포스터에 적혀있는 문구이다. 그러나,


진실은 거짓 혹은 망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다.


나는 후세 사람들이 군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그들의 '고통'만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의 방식에서 오로지 '고통'에 관한 것만을 뽑아 내려고 하는 것은 그 분들에게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역시 일종의 폭력이라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진실은 역사 속에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여성들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직접 체험한 삶의 진실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자와 듣고자 하는 자 간의 대화를 통해서 '복원'될 것이다. 생존자들이 점점 더 적어지는 상황 속에서, 진실은 점점 더 듣는 자의 성찰성과 자질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 18일


관련 정보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422027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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