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자와 아키라의 생존의 기록(1955)
※ 스포일러 있음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 중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생존의 기록(生き物の記錄, 1955).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나라에서는 ‘산 자의 기록’ 또는 ‘생존의 기록’으로, 영어로는 'I live in fear'로 소개되어 있다.
영화는 갑부 노인 나카지마 키이치의 자식들이 법원에 찾아와 자기 아버지를 ‘한정치산자’로 선고해 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나카지마 노인은 언제부터인가 수소폭탄에 대한 강박적 공포에 사로잡혀, 사비를 들여 거대한 지하 대피 시설을 짓다가 돈만 날리고 실패한다. 그러자, 또 다른 계획, 즉 가족 전체를 데리고 일본을 '탈출하여' 지구 상에서 수소폭탄으로부터 안전한 유일한 장소인 브라질로 갈 계획을 추진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노인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인에게는 이미 죽은 첩까지 합쳐 모두 첩이 3명인 데다가, 그 사이에 갓난아이까지 포함해서 3명의 자식이 있다. 나카지마 노인은 본처, 본처 사이에서 낳은 자식 4명과 그 가족들, 그리고 첩들과 혼외 자식들까지 몽땅 다 데리고 갈 계획을 고집스럽게 추진하다가 자식들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한다. 저항의 표면적 이유는 일본에서 사는 것이 나름대로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재산을 처분하게 되면 자식들 간의 재산 분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노인은 법원의 명령으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일을 내고 (무슨 일을 냈는지는 직접 영화를 보시라)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영화는 '다른 관점'을 가진 등장인물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노인의 두려움에 공감하게 한다. 영화 속 노인의 두려움에 공감하는 인물은 모두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들이다. 법원에서 노인의 한정치산자 선고 여부를 놓고 고심했던 치과의사 하라다는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르긴 하지만, 노인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며 줄곧 갈등한다. 정신병원의 담당 의사 역시 나카지마 노인에게 공감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또 다른 인물이다.
"노인이 정말 이상한 것일까? 지금의 현실에서 제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노인 담당 의사의 말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핵폭탄의 재앙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시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자국의 영토에 핵폭탄 투하라는 역사적 경험은 일본인에게 집단적으로 강박에 가까운 공포와 두려움, 상처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수소폭탄에 대한 ‘비합리적 피해망상’을 가진 한 노인을 통해, 그리고 이 노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비합리적 상상’과 ‘합리적 상상’, '비합리적 두려움'과 '합리적 두려움' 간의 경계에 대해 혼란을 갖게 된 몇몇 인물들을 통해, 이 영화는 1950년대, 종전 후 경제적 호황기를 누리면서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들에게 각인된 상처와 두려움을 보여준다.
사족. 치과의사 하라다역의 시무라 다케시는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배우. 극 중에서 하라다는 자기 아들과 함께 치과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내가 놀란 것은 1950년대 치과의 풍경이 첨단 장비를 갖춘 현재의 그것과 비교하여 그다지 구식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라다 역시 노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적어도 1920년대부터 치과 의사를 했다는 것인데, 그게 나에겐 놀라웠다. 알아보니 일본에서 치과 시술은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도입되었다고 한다. 1930-50년대 일본 영화를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본과 1970년대의 한국이 동시대적 풍경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 심지어 1930년대 일본의 일상적 풍경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 보다 더 근대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2008년 7월 12일 작성
※ 영화 정보 : https://www.imdb.com/title/tt0048198/?ref_=fn_al_tt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