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이가 있었다
드라마 <안나라수마나라>를 보고 떠오른 기억들
#1. 이런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맨 뒷줄에 앉았던 창백하게 잘 생긴 외모의, 말이 별로 없었던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지각했다는 이유로 담임한테 매일 아침 체벌받았다. 나는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 담임은 무뚝뚝하긴 했지만 친절하고 자상한 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아침마다 그 아이를 팰 때는 다른 사람 같았다.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킨 다음 그 아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칠 때 담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난폭한 표정과 기세는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장면에서 담임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기에,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담임은 지각한 여학생은 그런 방식으로 체벌하지 않았다. 오직 남학생만 그렇게 체벌했다.
한편, 담임에게 두들겨 맞았던 그 아이에게서 느껴졌던 것은,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었다.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짜증이나 반발심, 억울함, 분노, 두려움 등이 보였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맞아야 하는 현실을 견디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그런 표정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현실이 그 아이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 한 것일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이 몹시 낯설었고, 막연하게 그 아이가 내가 모르는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 같다. 그것이 유독, 지각 체벌을 받았던 남학생들 중에 그 아이를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다.
그 아이는 왜 매일 지각했을까? 담임은 왜 그에게 지각하는지 묻지 않았을까? 담임은 왜 그 아이의 삶에 관심이 없었을까? 동급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체벌' 폭력을 당해야 하는 현실에서도, 아침마다 반복적으로 지각했던 그 아이는, 수업 중에 조는 때가 많았다. 아침 일찍 또는 저녁에 일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유나 신문 배달, 아니면 건설 현장 노동 등 그것이 무엇이든 생계 노동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청소년을 상상하는 방식은, '집'과 '학교'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다. 두 개의 폐쇄적 장소에 유폐된 존재로서 10대, 그 상상계 외부의 청소년 삶에 대해 우리 사회는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때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어른, 그를 응원해 주는 어른, 그런 어른들이 있었길 바란다. 그가 지금 잘 살고 있길 바란다. 나는 왜 내내 말 한번 해본 적이 없었던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그 아이를 위해 이런 기도를 품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 이런 아이가 있었다.
1학년 때 반에서 늘 1~2등을 하던 동급생 여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는 공부에 매진하여 성적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급반이 된 후 반이 달라져서 잊고 있었는데, 2학년 어느 무렵 휴학했고, 결국 복학하지 못했다. '신경쇠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생긴 마음에 병은 나와도 연루되어 있었다. 어이없지만 적어도 당시 동급생들 사이에게는 그렇게 이해되었다.
사정인 즉, 이렇다. 반에서 입학 성적 순위 1위라는 이유로 나는 입학과 더불어 동급생들과 담임에게 주목받았다. 입학 성적 순위 2등이었던 그 아이는 나를 매우 의식했다는 것이다. 정작 1학년 내내 나의 성적은 상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내게 언젠가 1등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고 내내 불안해했고, 그 불안과 견제에 같은 반 여학생들 상당수가 공감했다.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나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고교 시절을 기면증에 가까운 신체적, 정신적 상태로 겨우 버티면서 지나왔다. 내가 아무런 해악을 끼친 적이 없는데, 내 존재 자체가 그 아이에게는 '신경 쇠약'이라는 마음의 병과 학업 중단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고교 시절, 그 상황은 내게 '주목받는 상황'이 일종의 상흔처럼 되어버린 계기 중 하나였다. 모든 사람들이 한 곳만을 바라보고 좁은 문을 향해 전력 질주하도록 조건화된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죄가 되는 상황을 강제한다. 무려 40여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청소년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무겁고 미안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2학년 때 등하굣길에 동행하곤 했던 동급생이 있었다. 이과반이어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오가며 얼굴을 익히다가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된 그런 이였다. 다소 엉뚱한 유머감각을 가진, 어딘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어쩐 일인지 늘 혼자였고, 나는 그 아이에게 외톨이로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어느 무렵부터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더 이상 등하굣길에서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중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고 들었다. 전해 들은 사정인 즉, 그 아이는 1학년 때 줄곧 전교 1등이었는데, 2학년 때부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상 행동을 보이더니 점점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살면서 가끔, 아니 늘, 학교에서 사라진 그 두 명의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주류의 삶에서 멀어져 버린 그 아이들과 나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강제된 경쟁 시스템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그 아이들의 존재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 부조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고, 가라앉거나 무너진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세상에서 뿌리내리고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웹툰 원작 넷플릭스 학원물 <안나라수마나라>, 이 드라마를 보고 고교 시절 내가 눈여겨보았던 이들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학교라는 공적 공간의 타자, 즉 잘 보이지 않았거나, 사라졌거나, 잊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고 말하고 들리길 바란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떠오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지도가 바뀔 테니까. 떠오르는 타자들의/에 관한 기억, 그것이 지금 이곳을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