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의 주변인들과 엮이는 이유
오사 게렌발 <돼지>
이 책 표지 뒷면에는 "저열한 인간들의 가스라이팅 난타전!"이라는 소개말이 적혀 있다. 이 책은 '단'이라는 이름의 진상 오브 진상 20대 남성 한 명을 중심으로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와 사귄 4명의 여성 등 5명의 주변인들이 서로 얽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사 게렌발의 책에는 부모에 의한 학대와 데이트 폭력을 겪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모티브로 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7층>,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 이 책 <돼지>를 읽어보면 핵심 진상 캐릭터의 주변 인물 5명 중 '미아'라는 인물이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진상 청년 '단'과 5명의 인물들 간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 책에서 미아라는 인물은 데이트 폭력 이슈를 다룬 <7층>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미아'는 <7층>의 주인공이 가해자의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핵심 진상 인물 '단'의 주변 인물 5명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진상이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질곡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미아'라는 캐릭터는 단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실체를 알면서도 그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들을 염려하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불행에 개입하려고 하는 인물이다.
대체 '미아'는 왜 이렇게 가스라이팅 쩌는 진상들과 엮이는 것일까.
책에 <작가의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작가 자신이 투영된 '미아'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겪은 일종의 '공감 장애 empathy disorder'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공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부적절하게 공감하는 것'이 문제인 장애 말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마음을 주는 것, '자기 보호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방식으로' 마음을 주는 것 등의 형태 말이다.
이 책에서 '미아'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 '단'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함부로 대해도 많이 참고 배려하는 인물로, 그들의 불행에 공감하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어권에서 이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을 '도어매트 doormat'라고 한다.이와 같이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공감의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대부분은 여성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미아라는 인물이 진상들과 자꾸 엮이는 이유는 부모의 정서적 방치를 통해 학습된 생존 전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는 능력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 데이트 폭력 가해자 '단'의 또 다른 피해자인 '베아'라는 인물 역시 작가 자신이 투영된 인물로 보인다. '단'을 만난 이후 '베아'는 <7층>의 주인공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미아'가 '단'의 폭력에서 벗어난 계기는 '단'이 타깃을 '베아'로 바꿨기 때문이었다면, '베아'의 '탈-폭력'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선'을 인식하고 그것을 방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미아'와 '베아'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오사 게렌발에게 다음에는 과도한/부적절한 공감의 문제를 겪는 인물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오사 게렌발이라면 정말 잘 쓸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