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다른 시간에 살고 있다

오사 게렌발, <시간을 지키다>

by 권수현

장애학 이론에는 "불구의 시간(crip time)"이라는 개념이 있다. 역사가 꽤 오래된 이 개념은 장애학 이론가 또는 활동가마다 개념 정의 및 적용 방식이 다르지만, 그 공통 기반은 "시간은 상대적"이며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이 개념의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표준적 인간'을 전제로 하는 규범적인 시간의 세계가 무너지고 각자 다른 시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장애학 운동가인 앤 맥도널드 Ann McDonald는 "불구의 시간(crip time)" 개념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시간 감각을 일상의 '속도'와 관련하여 이렇게 설명하다.


"나는 슬로모션으로 산다. 내가 사는 세상은 내 생각이 누구 못지않게 빠르고, 내 움직임이 약하고 불규칙하며, 내 말이 모래밭의 달팽이보다 느린 세상이다. 나는 뇌성마비가 있고, 걷거나 말할 수 없고, 알파벳 보드를 사용하는데, 1분 동안 150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시간당 450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속도가 20배 느리다. 느린 세상은 나의 천국일 것이다. 나는 당신의 세계에서 살도록 요구된다. 빠르고 힘든 세상 말이다. 만약 나에게서 느린 광선이 날아온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속도를 더 내거나, 아니면 당신이 속도를 줄여야 한다." (출처 댓글)


오사 게렌발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 <시간을 지키다>, 이 책은 부모의 "정서적 방치"를 경험한 작가가 어머니와 결별한 후 아버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유년기 및 청소년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왕복하며,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 위해 안타까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책에서 작가가 조명하는 지점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자신 만의 '시간' 감각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주고 보살펴주는 경험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자기 자신 외에 보호망이 전혀 없는 시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자칫 균형을 잃으면 "캄캄하고 텅 빈 우주 속으로, 그 어디도 받아주는 데가 없고,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진다." (pp.161~162)


작가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상실'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작가의 시간 감각에서 흥미로운 점은 시간을 자신을 보호해주는 '친구'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시간의 인격화가 의미하는 것은 작가에게 시간은 억압으로부터 놓여나는 것, 즉 일종의 해방이며, 이 책의 주제는 자신 만의 '시간'이 인정되고 존중받고 보호받는 세계, 즉 자신의 삶을 탈환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시간을 지키다'는 곧 '나를 지키다'이다.


"한 주 동안만이라도 어린아이 일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억을 되도록 오랫동안 무겁게 올려 두었다." p.179


작가는 좋은 기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시간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할머니 댁에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불안감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일주일 간의 기억. 그 열 살의 여름 한 주. 그것을 기억해낸 작가가 자신의 삶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은 그 기억에 무게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장애학 이론의 "불구의 시간(crip time)"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속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질량의 문제로 말이다. 장애학 이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는 그동안 이 개념의 미덕을 일상을 살아가는 '속도 규범'을 문제화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기억의 '무게'를 통해 자신만의 시간 감각을 재구성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접하고, 타자의 위치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 세상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새삼 느꼈다. 나와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에 의한, 소수자를 위한 인식론은 이렇게 짜릿한 해방감을 맛보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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