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디어 젠더 분석을 시작하게 된 계기
나의 미디어 젠더 분석은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 콘텐츠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용역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콘텐츠의 기획 의도, 목적, 논리 구성, 시나리오 등을 검토하는 와중에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 것. 목적과 기획 의도가 분명히 성평등에 초점을 맞춘 것임에도 그 내용에 성차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콘텐츠가 그랬다. 예외 없이 그랬다. 특히 시각 양식을 통한 재현에서 아주 심했다.
성평등 문화 확산 콘텐츠에서는 성차별적 요소가, 젠더 폭력 예방 콘텐츠에서는 젠더 폭력의 요소가 포함되는 현상. 콘텐츠의 목적과 내용/전달 방식의 모순, 그것은 콘텐츠 창작자의 시선에 내재된 성차별적 시선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시청자가 알아채지 못하면, 시청자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차별에 가담하게 된다. 젠더와 문화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시청자/학습자가 그것을 읽어내는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부하여 깨우친 사람은 가르쳐야 하니까. 그래서 시작하게 된 작업이 미디어 젠더 분석과 미디어 젠더 교육이다.
2.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
성평등 콘텐츠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면 늘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을 말이다. 젠더 폭력 예방 콘텐츠에서는 여성 대상 폭력을 선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성의 몸을 사물로 취급하는 시선이 바탕으로 깔려있다. 그러한 현상은 모든 형태의 재현에서 '예외'가 아니라 '근본'이다. 우리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적 재현의 문제는 오랜 세월 젠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통해 깊이 깨우치고 성찰하면서 살아온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조차 자주, 빈번히, 성차별적인 시선을 놓지 못하거나 그런 행동을 한다. 왜냐하면 성차별이라는 무의식이 여전히 지배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최근 언론에서 "일가족 사망 사건"의 기사 제목을 "동반 자살"로 표기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이런 사건은 이제 '가족 살해 후 자살'로 이해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비극을 주도한 사람이 '아빠'/'남편'인 경우,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사람은 '가장'으로 자리매김된다. '가장'이라는 용어가 불러오는 정동(affect), 그것은 깊은 연민과 동정이다. 이 정동은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많은 질문을 삭제한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 말이다.
성인 남자가 생계 전담자 역할을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히 수행할 수 없을 때, 그의 미성년 자식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부모라는 경제적 기반과 보호막이 없는 수많은 아동/청소년들을 이 사회가 어떻게 함께 돌볼 것인가. 부모가 특히 남성 가장이 자식을 소유물로 취급하여 목숨까지 거둬가는 이 현상의 이면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3. 취소 문화 cancel culture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 "마지막에 가족 여행을 선물로 제공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정치인이라면 분명 역량 부족 또는 자격 미달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역량 또는 자격을 갖춘 정치인이 드물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약 이런 발언을 했다고 마음에서 그 사람을 '취소'하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정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낮춰야 한다고 본다. 이런 발언의 문제를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계기로 거듭나고자 하는 태도와 의지가 보이는가. 나는 그것을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은 모두 여성 정치인이다. 한 사람은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하여 살아남느라 고군분투하는 젊은 여성 정치 초년생이다. 남성 중심적 조직에서 생존 모드로 살아가다 보면 '적응'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나쁜 조직에 적응하면서 사회화되는 것 말이다. 그 조직에서 사회화가 잘 된 사람, 사회성이 높은 사람은 그 조직의 성차별을 깊이 내면화한 사람이다.
차별에 '적응'할 것인가, 그것과 맞서 싸울 것인가. 늘 그러한 긴장 상태에서 생존 모드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내부의 이방인'에게 그러한 딜레마는 일상이다. 나는 이런 생존 모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곧바로 '취소'하기보다는 조직 내 그 사람의 위치를 본다.
내가 취소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완벽히 적응한 사람, 그리하여 보통 때에는 더 이상 생존 모드가 작동하지 않는 사람, 조직에 잘 적응한 대가로 가부장제 배당금을 누리는 사람이다. 가부장제 배당금은 '집단으로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말한다. 여기에는 금전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권위, 존경, 안전, 주택, 제도적 권력에 대한 접근, 감정적 지원, 성적 즐거움,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래윈 코넬, 리베카 피어스 저, <젠더>, p.281)이 포함된다. 성차별적 조직에 잘 적응한 일부 여성도 이런 혜택을 누린다. 성차별적 조직에서 강의해 보면, 조직에서 가부장제 배당금이라는 혜택을 누리는 여성들을 흔히 보게 된다. 성평등 교육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수업 방해를 하는 사람 유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내가 취소하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이제 막 진입 단계에 있는 사람. 그래서 '적응'과 '도전'의 딜레마를 가장 첨예하게 온 몸으로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 조직의 기득권 문법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것 때문에 조직 안팎에서 엄청난 공격을 견뎌야 하는 사람, 늘 긴장 상태에서 살아가느라 깊은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다.
나 역시 성차별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를 놓지 않는 한, '생존 모드', 즉 긴장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페미니스트의 운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 역시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깊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성차별을 내면화하고 있다. 나는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배우고 익힌 것을 공유하면서 함께 노력할 뿐이다.
취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더 나은 방향과 길을 모색할 것인가, 이것은 어렵다. 그래도 포기하면 희망은 보이지 않고 연대하면서 힘을 모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취소하는 일, 그것은 늘 고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