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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Aug 06. 2024

41. 중도와 고행(苦行)

붓다의 고행

붓다의 두 번째 고행


붓다는 왕자의 신분으로 살 당시 최고의 쾌락적인 환경에서 살아도 봤고, 출가 후 첫 번째 스승에게서 고행도 해보았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두 번째, 세 번째 스승을 만나 선정 최고의 경지인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도 오르게 된다. 여기에서 붓다는 선정 최고의 경지에서도 마음의 괴로움을 없앨 수 없음을 깨닫고 두 번째 고행을 선택한다. 천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붓다의 두 번째 고행은 첫 번째 고행과 의미가 달랐음이 분명하다. 두 번째 고행은 6년이나 지속된다. 그리고 고행을 멈춘 뒤, 깨달음을 얻는다. 붓다의 깨달음은 연기설과 사성제, 팔정도(중도)이고, 수행의 실천원리로 중도을 설했는데, 이것이 고락중도이다.        

   

두 번째 고행에 대한 궁금증     


1. 선정의 최고 경지에 오른 후, 왜 다시 고행을 선택했는가?

2. 깨달음은 선정의 연장선인가?

3. 왜 6년간이나 고행을 했을까? 6년 고행이 없었어도, 붓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6년 고행의 결론이 고행이 필요 없다는 것인가?

4. 고행을 내려놓고 깨달음을 얻으신 후, 왜 갑자기 고통과 쾌락의 중도(고락중도)를 말씀하셨을까? 특히, 왜 갑자기 쾌락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5. 깨달음을 얻으신 후 말씀하신 고락중도의 고(苦)가 고행을 부정한 것이라면, 애초에 선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고행을 시작하셨는데, 왜 선정에 대한 언급은 없는가?

6. 붓다의 1차 고행과 2차 6년 고행, 그리고 고락중도의 고행을 같은 의미로 봐야 하는가?          


두 번째 고행에 관한 생각   

  

1. 선정 최고의 경지에 오른 후, 왜 다시 고행을 선택했는가?     


선정 최고의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정’에 올랐어도, 선정에서 나오면, 마음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즉, 명상을 할 때는 괴로움이 사라진 것 같지만, 명상이 아닌 일상에서는 마음의 괴로움이 존재했다. 그래서 기존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고행이었다.


2. 깨달음은 선정의 연장선인가?     


깨달음이 선정의 연장선이 아님은 확실하다. 만약 선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굳이 고통스러운 고행을 했을 리 없다. 선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고행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결론적으로 깨달음을 가져왔다.

      

3. 6년간이나 고행을 했을까? 6년 고행이 없었다면 붓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6년 고행의 결론이 고행이 필요 없다는 것인가?     


붓다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는다. 붓다의 6년 고행이 사실이라면, 붓다의 1차 고행과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의 선정에 이르는데 1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전체 수행 시간으로 보면, 6년의 고행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육체에 고통을 주는 고행이, 선정 상태가 아닌, 일상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6년의 고행은 정신을 구속하고 있는 육체를, 고행을 통해 해방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6년간의 혹독한 고행을 한 뒤, 오히려 혹독한 고행이 깨달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고행을 놓는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다면, 6년간의 고행이 깨달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6년의 고행 동안 발전이 있었을 것이고, 마지막 단계에서 고행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행을 통해 깨달음에 가까워졌고, 마지막 한 단계는 고행을 풀고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깨달음이 찾아왔을 것이다.      


4. 고행을 내려놓고 깨달음을 얻으신 후, 왜 갑자기 고통과 쾌락의 중도(고락중도)를 말씀하셨을까? 특히, 왜 갑자기 쾌락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붓다께서 쾌락중도를 설하신 이유는 당시 시대사조에 대한 비판이었다. 중도의 양극단은 쾌락과 고행이다. 붓다 당시 여러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도 있었고, 극단적인 고행주의자도 있었다. 이들의 사상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쾌락주의는 단멸론을 주장한다. 단멸론이란 사람의 생명은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죽음을 절대적 소멸로 보고, 죽으면 영혼도 없고 다음 생도 없고 천상에서 태어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고행주의자들은 상주론을 주장한다. 상주론이란 사람의 생명과 특질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에 속박된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 또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아가 강화된 정신이 영혼을 정화하고, 죽음 뒤에 천상에서 태어나게 한다고 믿었다.      


붓다는 고락중도에서 이런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방법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5. 깨달음을 얻으신 후 말씀하신 고락중도의 고()가 고행을 부정한 것이라면, 애초에 선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고행을 시작하셨는데, 왜 선정에 대한 언급은 없는가?     


선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정으로는 절대 깨달음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고행 역시 깨달음에 다다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기는 하지만 깨달음은 선정도 놓고 고행도 놓은 어떤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 후에는 배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정은 일상에서 괴로움을 없애주지 못했다. 만약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선정명상의 연장으로 가능했다면, 붓다는 굳이 고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행은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자유로운 정신은 얻을 수 있지만, 결국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선정과 고행을 통해서 의식의 극점에 다다른 뒤, 그 의식을 버려야 깨달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락중도는 선정과 고행에 대한 언급이 아닌, 쾌락과 고통에 대한 중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6. 붓다의 1차 고행과 26년 고행, 그리고 고락중도의 고행을 같은 의미로 봐야 하는가?     


그럼에도 붓다의 2차 고행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선정을 중시하는 명상주의자들은 명상만이 최고의 공부법이고, 고행은 붓다가 부정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1차 고행과 2단계의 선정을 통해, 그 당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분이 아무 의미 없는 고행을 했을 리가 없고, 그런 고행을 6년씩이나 계속했고, 결국 고행이 필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리가 없다.      


최소한 2차 6년 고행은 1차 고행과는 그 목적과 의미가 달랐음에 틀림없다. 1차 고행의 목적은 정신을 강화하여 영혼을 정화하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2단계에 걸친 선정의 최고 단계에 만족하지 못한 이유는 선정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2차 고행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 아닌, 그리고 선정이 아닌 상태에서도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지 않기 위해 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2차 6년 고행은 육체에 속박된 정신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고락중도의 고(苦)가 의미하는 것은 1차 고행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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