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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l 31. 2024

40. 중도(中道)의 의미

수행의 실천원리

고락중도(苦樂中道) 

    

붓다께서 설하신 수행의 실천원리인 중도는 고락중도(苦樂中道)를 의미한다. 이것은 맹목적인 고행이나 감각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서 수행하라는 것이다. 고락중도라는 단어의 의미와 붓다께서 중도를 깨달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고행과 쾌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변이 있어야 중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행과 쾌락이 없는 중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도 없고 고행도 없다면 중도는 존재할 수 없다. 쾌락도 겪어보고 고행도 경험해서, 두 개의 양쪽 변을 만들어야 중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고락(苦樂) 없이 중도만 찾는다면 그 길은 중간의 길이 아닌, 좁디좁은 자신만의 오솔길일 뿐이다. 


그럼에도 고락중도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무조건 감각적 쾌락도 멀리하고 맹목적인 고행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행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중도와 중용     


붓다께서 깨달은 수행의 실천원리인 중도(中道)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통 중도는 양극단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8가지 실천원리인 팔정도를 의미한다. 즉, 중도는 양변을 여읜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양변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의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과는 차별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중용은 양극단의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의미로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고, 나쁜 의미로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또한, 중용은 사회적ㆍ정치적인 관점으로 도덕적 윤리적 측면이 더 강하다.      


이에 반해 중도는 고행도 버리고 쾌락도 버린 자리에서 행하는 수행의 실천원리이다. 또한, 더 깊은 의미로는 고행도 포함하고 쾌락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는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 개인의 수행원리이자 실천원리이다.    

 

온도의 비유   

   

사람이 살기 좋은 온도는 몇 도일까? 우리가 살면서 쾌적하다고 느끼는 봄이나 가을의 온도를 보면 12도~22도 사이라고 한다. 습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균하면 대략 17도 정도의 온도가 제일 쾌적한 상태일 것이다. 이렇게 제일 쾌적한 상태를 찾아나가는 것이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용은 치우치지 않은 적절한 상태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쾌적한 온도에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7도의 쾌적한 삶만을 고집하고 살 수는 없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겨울의 혹한도 견뎌야 하고 영상 40도에 다다르는 한 여름의 더위도 극복해야 한다.      


즉, 양변을 여읜다는 관점에서는 추위도 잊고 더위도 잊은 채 그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양변을 포함한다는 관점에서는 추위와 더위 속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각에 물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약간의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중도는 양극단에서 벗어나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알고 느끼면서도 치우치지 않고 포함한 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찾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정과 명상 –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다른 시각에서 보면, 마음 온도를 17도의 쾌적함을 찾아서 머물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정이나 명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선정에 들면 마음이 가장 쾌적한 17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평온해지고 고요해진다.      


하지만 선정에서 나와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17도의 마음이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 온도가 영하 10도 추위에서는 움츠러들고 영상 30도의 더위에서는 지치고 짜증이 일어나서, 17도의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다가 마음 온도가 영하 20도를 넘어가면 근육이 긴장하면서 두려움이 일어나듯 마음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고, 영상 40도가 넘어가면 온몸에 열이 나고 정신은 혼미해지듯 마음도 중심을 잃고 지쳐간다.      


이렇게 되면, 선정이나 명상은 소용이 없어진다. 괴로움과 고통만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정이나 명상만 가지고는 17도의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17도의 마음에만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혹한과 혹서의 온도가 찾아오면, 평정심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쉽게 부서진다.     


수행 -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만약 시베리아나 북극에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적도 부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혹한과 혹서의 온도에서 추위와 더위는 느끼지만, 두려움을 느끼거나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겪어봤기 때문이다. 수행은 이렇게 마음의 한계, 마음의 극점(極點)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한계점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얼마나 내 마음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상태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즉 보통 때는 잘 알 수 없는 마음의 밑바닥을 보아야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중생심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의 밑바닥인 중생심(衆生心)을 경험하고 나면, 고통과 쾌락의 허망함을 알 수 있게 되고, 이후 그 고통과 쾌락을 버려야만 비로소 붓다께서 설하신 수행의 실천원리인 중도(中道)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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