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길
약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요즘에는 명상이라는 말로 모든 명상을 표현한다. 이러다 보니 명상이라는 범주가 굉장히 넓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싱잉볼에도 명상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싱잉볼명상이라고 하고 불교의 선(禪)도 선명상이라고 말한다. 사람 대부분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싱잉볼과 불교의 선(禪)이 다르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사실 이 둘은 스텔스전투기와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만큼 차이가 난다. 하늘을 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속도, 상승고도, 엔진출력, 재질등 비교할 수 없다. 이처럼 싱잉볼과 선은 마음을 다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명상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이 모든 것을 정의하게 된 이유는, 서구인들이 남방불교의 수행법 중인 사마타ㆍ위빠사나 수행법을 meditation으로 번역했고, 이를 다시 일본에서 명상(瞑想)으로 번역하게 되면서, 남방불교의 수행법(사마타ㆍ위빠사나), 북방불교의 수행법(禪수행), 그리고 서구심리명상법, 기타 기법 위주의 명상법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 명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심어진 선입견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좌선과 호흡법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챙김이다. 다시 말하면 명상이라는 단어에 떠올리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 호흡을 챙기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Mindfulness로 상징되는 서양인들이 만든 마음챙김과 같은 서구심리명상이다. 결국, 정통 명상은 호흡법을 사용하는 좌선으로 이미지화되었고, 현대적인 명상은 서구 심리학 기반의 여러 기법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명상이라고 하면 가만이 앉아서 호흡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편, 명상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불교, 특히 북방불교에서는 명상이라는 단어 이전에 ‘수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보통 수행이라고 하면, 좌선을 포함한 8가지의 명상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라고 한다.
행주(行住): 움직임 속에서 혹은 멈춤 속에서, ~ 일을 하든 글공부를 하든 휴식을 취하든 운동을 하던, 쾌락을 즐기든 등등, 어떤 상황에서도 공부하라는 의미이고,
좌와(坐臥): 앉거나 눕거나, ~ 움직임이 멈춘 상태에서, 앉든 눕든 엎드리든 등등, 어떤 자세에서도 공부하라는 의미이고,
어묵(語默): 말하거나 침묵할 때, ~ 생각이 일어나서, 말하거나 혹은 침묵을 택하더라도 공부하라는 의미이고,
동정(動靜):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서 흔들리거나 고요할 때, ~ 어떤 생각이나 감정 상태에서도 공부하라는 의미이다.
즉, 나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이든지 간에, 언제나 일상 속에서 공부하라는 의미이다. 따로 공부한다고 앉아서 무게만 잡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언제나 화두를 들든, 대상에 집중하든, 마음챙김을 하든, 공부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간화선(看話禪) 혹은 화두선(話頭禪)으로 대표되는 북방불교의 선수행(禪修行)은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지 않는, 일상에서의 수행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불교권에서조차 선수행을 선명상이라고 이름을 사용하면서 수행의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결국 좌선을 제외한 다른 7가지 방식의 수행 형태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작은 의미가 큰 의미를 삼키게 된 것이다.
그러면 명상과 수행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사실 이런 언어적인 구분 외에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이 구분은 언어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분하였다)
명상은 지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재의 나를 가지고 하는 것이고, 수행은 지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재의 나를 넘어, 우리가 좀처럼 인식할 수 없는,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심연의 나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명상은 감각과 그에 의해 발생하는 감정과 생각, 그 자체를 가라앉혀 고요히 만드는 것이고, 수행은 그런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욕망의 원천이 존재하는 내면 깊숙한 저장 창고를 청소하고 그 저장 창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명상은 단순히 일어나는 의식을 가라앉히거나 씻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좌선이나 호흡법 혹은 싱잉볼이나 명상음악 정도의 방법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행은 깊은 곳에 숨어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번뇌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므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수행(修行)이라는 단어에는 치열한 고행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방법론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명상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앉아서 하는 좌선이나 들숨과 날숨을 가지고 하는 호흡법을 생각한다. 하지만 호흡명상은 사람들이 명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하나의 고정관념일 뿐이고, 사실 호흡법과 좌선은 수많은 명상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좌선과 호흡으로 하는 명상이 주류를 이루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호흡법이 초기 불교의 붓다가 행해서 깨달음을 얻은 명상법이라고 주장이 검증없이 받아들여진 결과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오해가 존재한다. 정말 붓다께서는 앉아서 하는 호흡명상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붓다의 깨달음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붓다가 출가 후에 처음으로 찾아간 스승이 박가바이다. 이 스승은 고행을 통해 영혼이 순수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행의 목적은 그런 순수해진 영혼으로 죽어서 천상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붓다의 목적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스승과 헤어진 그는 두 번째 스승인 알라라 칼라마와 세 번째 스승인 웃다카 라마풋다를 차례로 찾아가게 된다. 곧 그들의 경지를 초월한 붓다는 같이 교단을 운영하자는 제안을 뿌리친다. 그 이유는 선정 최고의 경지에 들었어도, 선정에서 깨어나면 마음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스승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년동안 고행을 한다. 이때 웃다카 라마풋다의 제자였던 5명의 비구가 같이 고행을 한다. 6년의 고행의 끝에, 붓다는 현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제자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된다. ‘현을 너무 강하게 당기면 끊어지고, 약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붓다는 고행을 멈추고, 스스로 너무 강하게 당기기만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우유죽을 얻어먹은 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고민 끝에 진리를 세상에 펴기로 한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곳이 같이 고행했던 5명의 비구이다. 이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바로 깨우친다.】
이 때 붓다께서 깨달은 것은 우주의 원리인 연기설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 시대에는 대표적인 수행방법이 선정(명상)과 고행이라는 점이다. 선정은 현대 명상의 의미와 가깝고, 고행은 불교 수행의 의미와 가깝다.
선정 최고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선정에서 깨어나면 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정을 통해서도 붓다께서 도달하고 싶은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고, 선정의 최고 경지에서도 괴로움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붓다께서 다시 고행을 선택했고 그 기간이 6년이나 됐다는 점이다. 이 두 번째 고행은 첫 번째 고행과는 다른 의미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고행의 목적인 천상에서 태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행을 통해 붓다께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다다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6년의 세월 동안 인간이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온갖 고행을 하신다. 최고의 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다다른 붓다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행에 바친 이유는 분명 무언가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행을 통해 무언가 얻으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아무 진전 없이 단지 고행만을 목적으로 6년을 허비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결국, 선정도 아니고 고행도 아니라고 느끼신 후에야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이 같이 고행했던 오비구라는 점이다. 그렇게 중도의 원리를 깨달으신 후, 같이 고행했던 오비구를 처음으로 찾아간 이유는 아마도 같이 고행했던 그들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제일 잘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붓다께서는 선정과 고행이라는 두 가지 수행법을 모두 해보신 후에야, 깨달음이란 쾌락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중도에 있다고 봤다. 다시 말하면, 선정과 고행을 둘 다 아우르는 수행을 통해서 붓다께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