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알음알이’에 대해 ‘약삭빠른 수단’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비슷한 의미로 ‘잔꾀’가 있다.또한, ‘서로 가까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 의미는 명상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관계없다.
알음알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면 ‘수증(修證)’이 아닌 머리로만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수증이란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마음속에서 증명해 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아는 척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알음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불교에는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라는 말이 있다. 해오는 이치로 깨닫는 것이고 증오는 이치로 깨달은 것을 수행을 통해 증명해 내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증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해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이치만으로 깨닫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해오는 알음알이와 구분된다. 알음알이는 낮은 수준의 해오와 낮은 수준의 증오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경우이다. 이치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약간의 수행을 통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갖게 되었고, 과거와는 달리 출판도 쉬워져서 수많은 책이 나와 있고 접할 기회도 많아졌다. 또한 인터넷을 발달로 원하는 정보를 쉽고 빠르게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 왔다. 하지만 사람의 평균적인 의식 수준이 과거와는 달리 많이 높아진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인간 업(業)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다. 예전보다 문화 수준은 올라갔으나, 그만큼 욕망의 수준도 올라갔다. 욕망의 크기가 커진 것만큼, 밝지 않은 상태, 즉 욕망에 가려 무명(無明)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 수준의 높고 낮음은 지식량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적인 욕구에서 비롯한 의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낮은 의식 수준의 사람이 명상, 특히 선수행을 하게 되면,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약간의 지식과 약간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과신하게 되어, 스스로 과대망상에 걸리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리고 그 과대망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책을 찾아보게 된다. 책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예가 나오면 그 책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신의 과대망상을 완성하는 데 사용한다.
더닝크루거 효과
처음 명상을 접하게 되면, 새로운 사실과 체험에 누구나 고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과 체험이 자신만의 경험이라고 착각해서 오히려 교만해지는 것이다. 심한 경우, 자신이 깨달았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스스로 아라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착각은 확실하지 않은 지식과 체험인 알음알이에 의해 생기는 결과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 한다.
*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
이것은 인지 편향의 하나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로 인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환영적 우월감으로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균 이상으로 평가하는 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여 환영적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크루거와 더닝은 “능력이 없는 사람의 착오는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의 착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 Wikipedia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는 방법
그러면 이런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해법이 있다. 첫째는 대중생활, 둘째는 눈밝은 선지식, 셋째는 고행이다.
첫째는 대중생활이다.
대중생활의 대표적인 예가 승가(僧家) 혹은 승단(僧團)이다. 이는 집단생활을 말한다. 집단생활이라고 해서 단지 모여서 사는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규율과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집단이어야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규율과 상하관계에 의해서 서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문제가 생기면 견책하는 방식으로, 자자(自恣: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식)와 포살(布薩:서로의 잘못을 돌아보고 뉘우치는 의식)이 있다. 이런 집단생활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넘치거나 고이는 것을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의 경우, 강원을 다니는 학인일 때는 자신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선방을 거치면서 조금씩 겸손해진다. 알음알이가 점점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 같은 경우, 실력이 모자라는 경우는 있어도, 겉넘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대중들과 단체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깎여 나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의 비율이 많은 것은 일반인들이다. 자신을 깎아나가는 대중생활을 겪은 스님들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개인마다 다른 방법으로 명상이나 수행을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은 그대로 둔 채, 학문이나 이론으로 자신을 덧칠하게 된다. 결국 자아가 똘똘 뭉쳐져서 오히려 명상이나 수행을 하기 이전보다 못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집단생활의 경우, 교주(敎主)가 없어야 한다. 승가는 붓다를 교주 삼아 예불과 기도를 통해 종교활동을 하고 수행도 하게된다. 그래서 개인이 교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 집단생활의 경우, 대부분 교주가 존재한다. 전통이 없이 개인에 의지한 집단생활은 사이비화 되기 쉽다. 마음공부가 높은 스승의 경우, 스스로 교주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실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도취되어 교주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둘째는 눈밝은 선지식이다.
선지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스승은 스스로 겪은 체험을 토대로 제자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가르친다. 이들은 자신의 체험까지만 가르친다. 그 이상은 다른 스승을 찾도록 돕는다. 그만큼 「스승과 제자」는 「선생과 학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선생은 책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학생들에게 이론을 가르친다. “반승” 혹은 ‘반생’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정도 체험을 한 상태에서 책에 의지해 이론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는 자신이 스승인지 선생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지고, 오히려 이론에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을 포장하게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교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스승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자이다. 자신이 체득한 만큼만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스승은 단지 제자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업을 받아줘야 한다. 그리고 제자는 자신의 업을 바쳐야 한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 하나를 받는 것을 지옥불을 하나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그런 상태가 되고 나서, 제자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라도 스승에게 인정받지 못해야 비로소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알음알이가 생길 틈이 없다. 그래서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제자의 생각을 한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는 고행(苦行)이다.
인간은 육체적인 고통 앞에 속수무책이다.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는 어떠한 이론도 소용없다.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의식은 주인을 잃게 된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숨겨진 의식들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밑바닥의 의식을 보고 나면 스스로 겸손해진다. 자신이 별것 없는 존재일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