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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l 09. 2024

37. 깨달음의 단계

- 경지에 대한 오해

명상이나 수행 혹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어느 정도 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지고 나면,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지나 깨달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누군가가 무언가 ‘체험’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러워하며 그런 체험을 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경지’나 ‘깨달음’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체험은 체험일 뿐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경지’나 ‘깨달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명상을 하는 중에,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거나, 긴 시간이 금방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거나, 어떤 빛을 보거나 그 빛이 내 몸을 감싸기도 하고, 혹은 그 빛이 내 몸에 들어오기도 하고, 온몸에 따스함이 퍼져나가기도 하고, 머릿속이 갑자기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밑이 덜컥 빠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고, 혹은 명상 수행이나 기도를 했을 때, 신이나 부처 혹은 신세계를 보는 환상을 보기도 하고, 어떤 신통력 같은 기묘한 능력이 생겨서 미래를 보거나 운명을 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사람에 따라, 재능에 따라, 혹은 근기(根機)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처음엔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뿌듯해지고, 자랑스러워지게 된다. 그리고 자기 과신에 빠지면서 이런 체험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찾아보고, 자신이 체험한 것과 비슷한 내용을 보게 되면 그 내용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경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보는 경전이나 기타 명상책들은 추상적인 단어나 모호한 문장으로 그런 경지를 설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관적인 체험을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모호한 표현에 의지해 자신의 경지를 확인하게 되면서 과대망상에 걸리는 경우가 꽤 많다.

     

이제 겨우 수행의 초입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초입을 구경 정도를 해본 것뿐인데, 자신의 체험을 뛰어난 수행의 결과로 착각한다. 이쯤 되면 이른바 ’명상병, 수행병, 혹은 기도병‘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불교에서는 마장(魔障)이라고 해서 아주 조심해야 할 경계라고 본다.


이런 명상병에 걸리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체험에 대한 갈구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에 갇혀버린다. 제험에 대한 갈구는 또다시 그런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그런 체험을 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체험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체험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혹은 그런 체험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가 만든 환상에 빠져 거짓으로 그 체험을 지속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논리에 갇혀버리는 것을 말한다. 논리에 갇혀서 비논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논리적인 이론에서 벗어나는 비논리적 사고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깨달음 없는 깨달음'이라던가, '소리없는 소리'라던가 등의 선(禪)문답의 세계를 인용한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하지만, 메아리 없는 공허함만 가득하다. 사실 이런 조사스님들의 선문답은 깨달은 상태에서나 가능한 대화인데, 마치 자신이 깨달은 것처럼 착각해서 이런 비논리적 선문답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럼 어떻게 내 수준을 알 수 있을까?     


화두를 가지고 참구해서 명상을 하는 경우,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은 자신이 화두를 어떤 상태로 들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된다. 여기에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용어가 등장한다.     


1. 동정일여(動靜一如)    

 

동정일여는 말 그대로 움직임 속에서 혹은 고요함 속에서 일념으로 화두를 챙기는 것을 말한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화두를 든 채 생활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삶을 살아가면서 마음 한편에서 계속해서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식인 일상적 자아 속에서 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화두를 계속해서 들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틈만 나면 화두는 놓쳐지고, 망상에 빠지기 일쑤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매진해야 한다. 수많은 좌절과 번민 속에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늘 내 생각대로 평생을 살아온 의식을 바꾸기는 당연히 쉬울 리가 없다. 욕망적 자아 혹은 일상적 자아가 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 욕망이 본체라고 생각하는 가짜인 나 – 가아(假我)는 내가 진리의 세계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갖은 고생과 노력 끝에 화두일념(話頭一念)이 되면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라 화두가 들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내 의지로 화두를 염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화두가 이어진다. 내 의식은 의식의 흐름대로 흐르는데, 의식의 한편에서 화두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의식의 전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화두는 그렇게 살아온 일상적 자아의 의식을 실체적 자아의 의식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2. 몽중일여(夢中一如)     


그렇게 일상에서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면, 더욱더 정진해야 한다. 고생해서 얻은 소중한 상태를 한 번 더 진전시켜야 한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이 상태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잠재의식의 세계인 꿈속에서도 화두가 챙겨진다.     


몽중일여는 꿈속에서도 화두를 챙기는 것을 말한다. 꿈속에서 화두를 챙긴다는 것은 꿈을 꾸는 자와는 별개로 화두를 챙기는 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잠재의식 속에서 화두를 챙기는 자아를 실체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실체적 자아는 내 안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자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본질적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자아들은 상황에 따라 변질되고 변화한다. 하지만 이 실체적 자아인 ’진아(眞我)‘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어느 정도 명상이나 수행을 하고나면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과 몽중일여는 다르다. 단순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아는 것과 코를 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잠재의식이 맑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발생한다.      


몽중일여는 단순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화두를 드는 상태이다.      


담이지만 불교계의 큰스승인 성철스님은 이 정도 경지는 되어야 큰 절 주지를 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동정일여를 통해 자의식의 전변이 일어나고 나면, 꿈속에서도 화두를 드는 몽중일여가 되고, 이렇게 몽중일여가 되어서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면, 중생심을 가진 인간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몽중일여가 되면 의식에 격변이 일어난다. 나를 제한하고 있던 의식의 껍질이 깨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깨져나가면 기존의 나와는 다른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다. 개성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만, 나를 속박하던 의식의 틀이 깨지는 것이다. 성격이 변한다거나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틀이 깨지고, 그 바깥에 존재하던, 더 넓고 큰 틀까지 자아가 확장되는 것이다. 새로운 자아의 틀이 생기면 마음의 범위가 넓어져서, 예전에 끄달리던 작은 마음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몽중일여의 상태에서는 이런 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아무리 틀을 깨더라도 틀이 남아있는 것이다.      


3. 숙면일여(熟眠一如)     


몽중일여가 되더라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그때는 화두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아가야 하는 곳이 숙면의 세계이다.      


숙면(熟眠)은 꿈도 꾸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잠을 자면 꿈을 꾸는 상태이거나 완전한 수면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잠이 들거나 깰 때 의식이 돌아오는 선잠인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상태의 잠을 자게 된다. 이렇게 꿈도 꾸지 않는 완전한 숙면의 상태에서도 화두를 챙기는 것을 숙면일여라고 한다. 자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화두를 챙기는 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자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 화두를 챙기는 상태의 자아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나‘라는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 화두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나‘는 사라지고 ’화두‘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러면 나를 제한하고 있는 틀이 사라진다. 존재로서의 나는 실재하지만, 실체로서의 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무아‘의 경지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아에는 아직 ’무아‘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사라져도 화두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아를 넘어가야 한다고 한다. 무아인 상태에서도 더욱더 정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매일여(寤寐一如)이다. 깨어 있으나 잠을 자고 있을 때, 언제라도 정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무아도 남아있지 않은 깨달음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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