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을 헤매는 인간
앞 장에서 본 것처럼 인간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또 속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속고 속이는 인간은 늘 어둠 속에서 헤매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佛敎) 혹은 불법(佛法)에서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밝지 않음’ 즉, ‘무명(無明)’이라고 표현한다. 이 무명은 인간이 괴로움에 빠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며, 인간이 윤회(輪回)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스스로 속고 속이면서 밝지 않은 상태의 나를 ‘가짜인 나’ 즉, 가아(假我)라고 한다. 이에 반해서 자신을 속이고 속는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속는 상태를 ‘진짜인 나’를 진아(眞我)라고 보는 것이다. 진아는 스스로 속고 속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속이는 것은 알면서 속는 상태를 말한다. 무아(無我)는 속이는 주체나 속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아(無我)가 돼야 스스로 속이거나 속지 않게 된다. 무아와는 달리, 진아에는 주체와 객체로서의 나(我)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있지만,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견해에서, 진아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 현재의식에서의 자아를 ‘일상적 자아’라고 한다.
일상적 자아는 욕망에 충실한 자아를 말한다.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매일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일상의 자아를 말한다. 사람 대부분은 이런 일상에서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언제부터 ‘나’였는가?
나는 왜 ‘나’로 살아가는가?
나 외에 다른 일상의 삶을 살 수는 없는가?
세상에 있는 수많은 ‘나’라는 존재들은 왜 그렇게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그 누구도 ‘나’로 살아가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타고난 자질과 환경에 의해 ‘나’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자질과 환경은 왜 나에게 일어났는가?
내가 ‘나’이길 선택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선택권은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저 주어진 대로의 ‘나’로 살아갈 뿐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욕망대로 사는 삶을 살아가는 ‘나’를 ‘욕망적 자아’ 혹은 ‘일상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의 의식은 진짜 자의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를 ‘가아(假我)’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관찰자는 상대인지의 관찰자이다. 이 ‘일상적 자아’인 ‘가아’의 상태에서도 ‘상대인지’는 가능하다. 서구심리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에 해당하는 상대인지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역시 현재의식 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자아의 관찰일 뿐이고, 다중적인 자아가 서로 관찰할 뿐이다. 내면 깊숙한 통찰은 불가능하다.
결국 이 의식 세계에선 내가 나를 속이고 속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다. 일상의 삶 속에 갇혀서 일상의 자아가 나인 줄 알면서 살아가는 일상의 의식은 의식의 근본 발생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의 깊은 곳인 심층의식(잠재의식)에서 발생하는 의식의 원인을 찾아내기 전에는 자신을 속이고 속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방법이 없다.
이 영역은 ‘현재의 나’의 의식이고 ‘일상적 자아’의 의식이며,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의식이다. 과거의 내가 존재했고, 현재의 내가 존재하기에, 미래의 내가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는 의식이다. 그렇게 표면의식은 ‘현재의 나’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현재의 의식이다.
이 잠재의식에서의 자아를 ‘실체적 자아’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욕망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끔 이런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언가 진실한 세계가 존재하고, 그런 세계에 사는 내가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은 ‘꿈속의 나’의 의식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 그 근본에 있는 의식의 집합체이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영역이다. 그래서 그런 실체를 ‘진아(眞我)’로 본다.
이 ‘진아’의 개념은 브라만(힌두)교의 아뜨만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진리 그 자체인 ‘브라흐만’의 일부로서 내 안에 존재하는 실체인 ‘아뜨만’을 인정한다. 그리고 브라만교에서는 이 아뜨만을 ‘윤회의 주체’로서 인정한다. 윤회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 무언가’가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를 영혼이라고 하기도 하고, 브라만교에서는 아뜨만, 자이나교에서는 지바라고 부른다. 이것은 윤회의 주체가 없다고 보는 불교의 무아 사상과 배치되는 개념이다.
잠재의식에 존재하는 자아를 ‘진아(眞我)’로 볼 때,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 중에서 관찰하는 자를 진아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관찰자는 ‘심층인지의 관찰자’이다. 심층인지는 상대인지(메타인지)와는 다르게 잠재의식에서만 가능한 인지이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이나 일반적인 명상을 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알 수 없다. 심층인지는 깊은 수행을 통해 잠재의식을 엿봤을 때, 그 존재를 알 수 있고, 잠재의식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을 때, 심층인지가 가능하다.
이렇게 잠재의식의 세계를 관통하더라도, 내가 나를 속이고 속는다는 것은 알지만, 결국 자신에게 속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중생심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중생심’은 믿지 않지만 ‘중생심을 가진 인간’은 믿기 때문이다. 중생심을 가진 인간, 즉 나(我)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의 자아를 ‘부존재적 자아’라고 한다. 부존재적 자아는 자아가 없는 것을 말하며, 즉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무아는 ‘존재로서의 나’는 있지만,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로서의 나’가 있다”라는 것은 지금 이렇게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생각하는 나는 있다는 의미이고,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라는 것은 ‘나’를 탐구해서 깊은 의식의 층으로 가보면, 도무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무의식의 세계에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의식과 생명을 유지해 주는 생명의식만이 존재할 뿐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무아는 불교사상의 핵심인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브라만(힌두)교에 말하는 윤회의 주체인 아뜨만,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지바(Jiva), 그리고 일반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불멸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아의 상태에서는 내면의 관찰자가 존재하질 않는다. 생명의 흐름과 의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속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동북아불교에서 말하는 주관도 객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에서는 관찰하는 자도 관찰당하는 자도 없는, 오직 ‘의식의 흐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自我)에는 ‘실체(自)로서의 내(我)가 없다(無).’이고,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불멸의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서양의 과학이 종교에 끼친 영향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다윈의 진화론은 종교에서, 특히 윤회를 주장하는 불교에서 영혼을 해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인류의 기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현대 인류의 기원을 호모사피엔스라고 한다면, 대략 20만 년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인간의 영혼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즈음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단순한 숫자가 맞질 않는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현대의 인구수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현재 전 세계의 인구는 대략 80억 명이라고 하는데, 불과 50년 전인 1974년, 전 세계의 인구는 40억 명에 불과했다. 그럼 50년 동안 새롭게 만들어진 40억의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실체가 있는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라면 숫자가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영혼을 육체에서 벗어난 자아라고 전제한다면, 영혼의 발생에 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아’를 가진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 없이 태어나서 존재하는,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때부터 개체로의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갑자기 무존재가 존재가 되고, 다시 그 존재가 영원히 윤회한다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작용(作用)으로써의 자아’는 존재하지만, ‘실체(實體)로써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연기설이고 무아이며 공(空)이라고 보는, ‘인연에 의한 의식의 흐름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실체가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조합되는, 작용에 의한 ‘나’일 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