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두타행(頭陀行)과 고행(苦行)
수행에서 고행의 의미
종교와 고행
명상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고행이라고 하면, 인도나 티벳의 고행수행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다리 하나를 들고 평생을 살기도 하고, 팔을 위로 뻗은 채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천주교인이라면, 영화 다빈치코드에 나오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수도승이 자신의 등에 채찍질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듯 대부분 종교에는 고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도의 고행수행자 중, 힌두교의 수행자들은 고행을 통해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이고, 자이나교 같은 경우는 영혼을 정화하여 업을 소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천주교의 일부 수도승들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 각각의 목표은 다르지만, 종교에서 고행은 오래된 수행법이자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붓다께서 고행을 부정한 후, 중도(中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락중도(苦樂中道)라고 해서, 맹목적인 고행이나 감각적인 쾌락을 부정했을 뿐, 붓다 스스로 행한 6년의 고행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붓다의 수행 과정을 살펴보면, 선정과 고행을 통해 수행한 뒤, 그 양변(兩邊)을 놓은 후에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즉, 선정을 통해 마음의 고요함을 얻고, 고행을 통해 마음의 한계치까지 몰아붙인 후, 그 두 가지의 수행법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두타행(頭陀行)
불교에서의 고행은 두타행(頭陀行)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타행은 의식주 실생활에서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떨어내고, 소욕(少欲)과 지족(知足)을 실천하여 번뇌를 털어내는 생활 수행법이다. 즉, 번뇌를 끊도록 하는 수행과 고행을 두타행이라고 하고, 초기불교의 문헌과 후대 대승불교의 문헌에서도 언급된다. 이처럼 두타행은 넓은 의미에서 고행(苦行)을 포함한다. 두타행은 일반적이지는 않아도 초기불교에서부터 유지되던 전통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교단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두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들의 경우, 보통 새벽에 일어나 기도나 예불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세상의 복장이 아닌 승복을 입고, 최소한의 의복만을 가진 채, 편하지 않은 잠자리를 다른 도반들과 같이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편하지 않은 삶 속에서 스스로 경계하여 탐진치에 물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부가 진전되지 않으면, 자신을 더 불편한 상태로 몰아넣어,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삼천 배나 만 배를 한다거나, 아니면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버티거나 혹은 잘 때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기도 한다. 어떤 스님은 새벽에 일어나 커다란 돌을 등에 메고 산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고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행 특성상, 화두(話頭)를 드는 수행을 많이 하는데, 화두를 들고 집중해서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고행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고행과 더 이상 고행이 아닌 것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고행이라고 한다면, 고통스러운 행위는 모두 고행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행과 고행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첫째, 익숙해진 고통은 더 이상 고행이 아니다. 처음에 인도 수행자의 고행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들의 고행은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처음 마음을 내어 팔이나 다리를 들 때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처음의 고통과는 다를 것이고, 어쩌면 감각이 사라져서 고통 자체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고행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고행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둘째, 고통스러운 쾌락은 고행이 아니다. 예를 들면, 마라톤이나 철인3종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경기 중에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극복하면서 경기를 마친다. 같은 고통이지만 차이가 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희열과 성취감, 그리고 목적이 존재한다. 또한, 러닝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같은 경우이다. 중간 강도의 운동, 특히 달리기를 30분 이상 계속했을 때 느끼는 도취감 혹은 달리기의 쾌감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고행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다르다. 고행의 목적은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집중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심층의식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고행의 목적
사람의 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표면의식과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존재조차 인지할 수 없는 심층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문제들은 모두 심층의식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표면의식에서는 절대 나의 심리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없다.
고행을 하는 이유는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썩고 있는 심층의식을 흔들고 뒤집어서 제대로 보기 위함이다. 의식을 연못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보통 때 연못의 물은 맑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못의 밑바닥을 긁으면 켜켜이 쌓여있던 바닥에서 흙탕물이 일어난다. 이렇게 밑바닥에 숨어있는 의식을 일으켜야만 내면에 숨어있는 심층심리가 드러난다. 일상의 의식에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존재조차 인지할 수 없는 심층심리가 고행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정수행은 집중을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함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선정수행은 마음에 붙어있는 찌꺼기들을 계속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정에서 나오면 다시 찌꺼기들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고행은 일부러 마음의 바닥을 뒤집는다. 그렇게 일어나는 마음의 찌꺼기들이 번뇌로 발전하지 않도록 일일이 확인하고 인정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심층심리에 있는 마음의 찌꺼기인 중생심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이 고통을 외면해 왔고, 의식 깊숙한 곳에 있던, ‘아상(我相)’이 자기는 옳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게 되고, 자아가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된다.
고행의 효과
고행은 매일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시간 동안, 익숙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 매일의 고통 속에서, 고통을 바라볼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가 매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변화하는 마음을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내면 깊은 곳인 심층의식에 존재하는 인간의 저열하고 이기적인 마음(중생심)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얼마나 정신이 쉽게 무너지는지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큰 육체적인 고통에 직면하게 되면, 거짓으로 꾸며낸 일상적인 표면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표면의식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면, 심층의식에 숨겨놓았던, 보통 때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인 이기적이고 저열한 의식이,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튀어나오게 된다. 이렇게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는 일반적인 선정의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
고행은 정신이 선명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심층의식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더 잘 인지할 수 있다. 고행을 하다보면, 정신의 선(線)이 날카로워져서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더 잘 인지하게 해준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통해 자아를 인식한다. 인간의 정신은 자유롭지만, 육체의 고통에는 쉽게 굴복한다. 반대로 육체의 편안함에도 쉽게 굴복한다. 그래서 좌선이나 호흡법만 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명상법일 뿐이다. 앉아서 하는 좌선 계열의 명상법이 나쁘다기보다는 여러 수행법을 병행할 때 최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선수행을 포함한 대승불교권에서는 수행의 방법으로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을 다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