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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l 01. 2022

C. 관성적인 삶

업(業)의 관성

일반적인 명상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마음이 날뛰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마음이 날뛰고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뛰고 움직이는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마음과 같이 움직이거나 흥분에 빠져있는 상태일 때는 잘 모르지만 흥분이 가라앉고 내가 멈추려고 할 때 날뛰고 움직이는 마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날뛰고 움직이는 마음은 내 마음의 본체에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기고 이러한 흔적들 중에 상처로 남는 것들이 생긴다.


그러면 날뛰며 움직이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 무엇에 대해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 안에 있는 요소들을 관찰하여 분류하고 실험하고 연구한 결과에 따라 이치를 찾고 이론화해서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들을에게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한다. 처음에는 공감을 통해 마음에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며 적절한 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의 신뢰가 생기면 그것을 바탕으로 알맞는 치료법을 행한다. 이런 치료법을 통해 마음의 요소들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심리학적인 치료법 중에 불교의 명상을 차용하여 심리학에 맞도록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명상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명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업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략적으로 업을 알고 있기는 한다. 자신이 원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또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거나 자신이 해결을 하더라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오롯이 감당해야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일 때 업이라는 말을 한다. 이 때의 업은 ‘운명’이나 ‘팔자’같은 의미로 쓰인다. 다시 말하면 이런 운명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혹은 내 마음의 요소들이 날뛰고 움직이는 방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리고 '나의 선택'은 언제나 왜 똑같은 방식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체념을 '운명'이나 '팔자'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운명이나 팔자를 주어진 업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의 내 삶이 업에 의해서만 정해진다면 그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삶 자체가 업에 의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회피를 하게 된다. 즉, 자신은 어쩔 수 없고 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변명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며 자신의 책임이나 잘못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의 현실에서만 보자면 위에서 말한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선택을 했고 그러한 선택들을 통해 그러한 상태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외부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생각해보면 내가 선택한 부분의 부정적인 측면인 경우가 있다.


이렇게 보면 업을 현재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 전생의 업도 있고 태어난 이후 만들어진 업도 존재한다. 이러한 과거의 업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사는 삶을 통해 보다 나은 미래의 업을 만들 수는 없을까? 당연히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존재하고 이러한 힘을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선택점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 하나의 운명을 만들고 나아가 자신의 업을 만들어 간다. 수동적인 의미의 업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내가 개척하는 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과거의 삶의 형태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에 벌어질 삶의 형태는 바꾸는 것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려는 ‘나’도 과거의 업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려는 ‘나’를 자꾸 방해한다. 이렇게 방해를 받는 이유는 과거 전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보통 습관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선택들을 하고 이러한 선택들이 어느 순간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그렇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선택들에 의해 마음에 길이 생긴다. 이렇게 생겨난 길을 따라 다시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습관적인 선택의 삶이 괴로움을 유발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엉켜있는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통해 ‘새로운 나’를 향해가려는 ‘과거의 나’를 잠시 멈추어 보고, 과거의 내가 살아온 방식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습관적인 삶은 관성적이다. 이러한 관성적인 삶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느 길이 만큼 계속 전진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멈추려고 하면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마음도 한동안 전진한다. 이렇게 멈췄지만 한동안 전진하는 기간을 제대로 보게 해주는 것이 명상의 시작이다. 한동안 전진하는 기간에 대해 실망도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관성에 의한 진행이 끝날 때 이제는 다른 단계의 명상을 해야한다. 이 단계의 명상은 멈춘 자신을 비교적 제대로 보게 만든다. 끝없이 달리기만 해서 지치고 혼탁한 마음을 맑고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 나만의 길이 아닌 수많은 길들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명상은 여기에서 또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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