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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Dec 26. 2022

17. 중생심 (衆生心)

사람의 마음, 짐승의 마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짐승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중생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생>즘생>짐승의 순서로 중생(衆生)이라는 한자어가 우리 말로 귀화하여 짐승이라는 단어가 됐다. 지금의 짐승의 뜻은 동물들을 지칭하며 우리가 사람을 향해서 짐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보통 동물적인 욕망, 즉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짐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럼 중생(衆生)과 중생심(衆生心)의 의미는 무엇일까? 

넓은 의미로 중생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일반적인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중생심에 대해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 중생이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2. 번뇌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마음

3.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그러므로 중생심은 중생이 가지는 마음을 의미한다. 즉, 중생심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중생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시기, 질투, 탐욕, 인색, 옹졸, 이기, 비열, 간악, 흉포, 악독, 잔인, 사특, 간교, 허영, 나태, 거만, 교만, 비굴, 교활, 무례함, 간사함 등과 같은 좋지 않은 마음들과 포용, 이타, 정의감, 의리, 자애, 겸손, 희생 등과 같은 좋은 마음, 그리고 강직, 인내 등과 같은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한 마음 등과 함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마음을 중생심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 사람인 이상 모든 종류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아’‘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인 이상 모든 종류의 중생심을 가지고 있고, 만약 그런 중생심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성인(聖人)이거나 미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내 안에 모든 중생심이 전부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걸까? 

 첫째, 이제껏 그런 중생심이 일어나지 않는 좋은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비열하거나 이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그런 마음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 대부분은 전쟁터나 기아에 허덕이는 환경과 같은 극한의 상황인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 마음이 일어날 환경을 만나기가 힘들다.

 둘째, 그런 마음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런 생각을 부정하고 다른 마음으로 대치한 경우이다. 그래서 그것이 습관화되어서 자신은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즉, 생각으로 생각을 덮는 것을 말한다. 이때 자신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생각을 덮는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습관화된 생각의 통로를 만들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 큰 뜻으로 작은 마음을 덮는 것이다. 보다 큰 이상, 보다 큰 뜻으로 작은 마음을 덮는 경우이다. 애국심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의사(義士)나 열사(烈士)와 같이 국가를 구한다는 대의(大義)를 위해 작은 마음들을 덮어가는 경우이다.

 앞의 두 경우 모두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한계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좋지 않은 환경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좋은 마음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마지막은 큰 뜻 안에 작은 마음이 포함되어 녹아버린다. 이런 큰 마음은 자신을 인간적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중생심은 언제 일어나는가?

 이런 마음들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경계에 부딪혔을 때 일어난다. 내 마음 안에서 저절로 중생심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중생심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자신의 경계에 부딪힐 때 일어난다. 경계란 대상을 전제로 한다. 대상이 존재해야 중생심이 일어나고, 대상이 달라짐에 따라 중생심도 차이를 보인다.

즉 대상의 똑같은 행위에 대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한 행위와 경쟁 관계의 동료가 한 행위는 그 느낌이 다르고 일어나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럼 왜 중생심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 이러한 중생심을 낱낱이 알고, 스스로 그 존재를 인정해야만 자신에게 속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지 않아야 남에게 속지 않으며 그래서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러한 마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마음공부는 이런 중생심을 낱낱이 느껴서 그런 마음에 속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공부인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중생심을 제대로 보고 알기가 힘든 이유가 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의 영속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늙지 않을 것 같고, 자신은 죽지 않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반발심으로 젊어지기를 갈구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해 자신을 속이려고 만들어낸 마음, 자신의 영속성을 믿는 마음이 중생심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실시간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죽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중생심이며 어리석은 마음이다. 즉, 중생심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중생심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깨달음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많은 작은 깨달음들이 있다. 하지만 그냥 앉아만 있어선 깨달음이 오질 않는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은 수행이고, 수행을 통해 자신의 중생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중생심에는 수많은 마음이 숨어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한 마음에는 언제나 이면이 존재하고 그 이면에 붙어있는 것이 중생심이다. 자신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마음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부정적인 마음이 중생심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오직 모를 뿐.”스스로 안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을 한다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완성됐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행을 통해 얻은 작은 깨달음을 큰 깨달음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자신을 완성해나간다. 그래서 겸손함을 잃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완성되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공부는 더 멀어져간다. 그렇게 완성됐다고 착각하는 마음이 중생심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생심을 제대로 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모를 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인 것이다.      


 중생심을 제대로 아는 것은 부동심(不動心)과 더불어 자비심을 일으키는 데 필요하다. 자신의 중생심을 완전히 파악하지 않으면 자비심은 일반적인 동정이나 연민심과 다를 바 없어진다. 자신의 중생심에 무지한 상태에서 일으키는 마음은 자비심의 빈틈을 만든다. 또한 앞의 장에 말한 경계와도 관련이 있다. 경계를 타파하는 것이 중생심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경계를 타파하여 중생심을 남김없이 알아야 진정한 자비심이 생기는 것이다. 즉 자비심의 네 가지, 사무량심(자비희사)에서 마지막 사(捨)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 필요하고, 이 관문을 뛰어넘어야만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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