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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Dec 11. 2022

16. 경계(境界)

나를 제한하는 또 다른 나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보통 마음의 괴로움을 줄이는 것을 기대하면서 명상을 시작한다. 마음속에 출렁이는 마음의 괴로움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명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엿본다. 출렁이는 마음들 – 감각, 감정, 생각, 욕망 등을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출렁이는 마음이 명상을 통해 잦아들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의 고요함을 얻게 된다. 그렇게 고요함을 얻는 과정에서 집중과 마음챙김이라는 부수적인 이익도 생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다시 세상에서 일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고요한 줄 알았던 그 마음은, 다른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그 고요함을 잃고 출렁이는 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런 괴로움이 발생하는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분명 잔잔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던 마음이 새로운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출렁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의 힘을 조금 얻은 것 같지만, 조금만 변형된 괴로움이 생기면 대책 없이 그 괴로움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기출 변형된 외부의 충격에는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의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보이진 않지만 크기가 존재한다. 사람마다 그 마음의 크기, 모양, 색깔, 질감(결)이 다 다르다. 이 중에서 모양, 색깔, 질감(결)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개인의 성격이라서 바뀌질 않는다. 타고난 개인 고유의 특성이기 때문에 바뀌질 않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에 적응하면서 표현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지만, 기본적인 개인의 특성은 나이를 먹으면서 잦아들긴 해도, 변하질 않는다. 즉, 외부로 표출되는 표현방식은 달라질 수는 있어도 개인의 특성은 변하질 않는다. 유일하게 변화가 가능한 것은 마음의 크기이다. 마음의 크기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 하지만 마음의 크기는 노력에 따라 성장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의 크기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마음의 요소들이 작아지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을 대하는 방식이 변한다.    

 

 마음에 크기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비추어보자면, 사람들은 똑같은 행위에 대해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같은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냐 혹은 싫은 사람이 하는 것이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진다. 같은 행위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웃어넘길 수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경우에는 마음에 걸림이 남는다. 이것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이 느슨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빡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싫은 사람의 싫은 행위도 받아들여지는데,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좋은 사람의 좋은 행위도 거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음이 유연해지기도 하고 딱딱해지기도 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따라 혹은 내 기분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마음도 한계점이 존재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지점, 즉 마음의 극한점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마음의 경계’이자 ‘나의 경계’라고 한다. 그리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바깥경계’라고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안경계’라고 한다. 즉 외부의 상황과 내면의 마음상태로 나누는 것이다.     

 

 이 마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경계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타고난 그릇’이 존재하는 것이다. 작은 그릇은 안에 담을 수 있는 양도 적고 작은 충격에 쉽게 흔들린다. 반면에 큰 그릇은 안에 담을 수 있는 양도 많고 충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그릇의 소인배들은 쉽게 동요한다.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쉽게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 본인 자신도 힘들어진다. 반면, 큰 그릇의 대인배들은 작은 충격엔 반응하지 않게 되고, 느낌이 있더라도 쉽게 흡수된다. 외부의 충격을 바깥경계라고 봤을 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면서 쉽게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큰 사람들은 잘 흔들리지도 않고 괴로움도 미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마음의 크기에 따라 바깥경계에 대한 안경계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작은 종은 크게 때리면 깨지지만 큰 종은 크게 때리면 좋은 소리를 낸다.      

 

마음의 크기는 지능과는 완전 별개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경우 오히려 마음이 좁은 경우가 더 많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자신의 분별을 믿으며 자신의 판단이 늘 옳다고 느낀다. 즉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믿음에 갇혀서 점점 마음이 좁아진다.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상대가 틀려야 하기 때문에, 또한 상대도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면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겸손하거나 너그러운 사람들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둔다. 자신의 분별이나 자신의 판단보다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둔다. 나도 옳을 수 있고 상대도 옳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넓어진다.


마음의 크기는 경계를 극복하면서 성장한다. 불교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백 척이나 되는 긴 장대 위에 있어서 다시 한 걸음 더 나간다’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으로 막다른 위험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한 발 더 나가라’는 의미이다. 즉,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극한점에서 한 번 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극한점을 극복해야만 마음의 경계가 넓어진다. 도저히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없을 때 내딛는 그 한걸음이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수행도 이와 같다. 집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챙김에도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마음을 바라본다고 해서 자신의 성격이나 특성이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늘 테두리 안에서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사용하는 마음만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경험해보지 못한 바깥경계에 부딪치면 그동안 해왔던 수행은 온데간데없이 나를 놓치게 된다.     

 마음의 크기를 성장시키는 것은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마음의 크기(안경계)가 커지고 커져서 어떤 외부의 자극(바깥경계)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외부의 자극에서 흔들리지 않을 때, 마음은 완전한 휴식을 얻는다. 


나아가 이런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면, 나의 경계도 사라지고 어떠한 경계에도 걸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무아무심(無我無心)이며 명상의 요체이며, 주어진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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