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멈춤

갈애(渴愛)의 멈춤

by Monked

갈애의 의미


명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어떤 명상도 처음엔 멈춤에 초점을 둔다. 멈춤이라는 것은 명상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멈추는 것일까? 멈춘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괴로움을 멈추기 위해 명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에서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본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한 괴로움이 아니라면, 괴로움의 가장 큰 원인은 그런 욕망을 집착하는 ‘나’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가장 큰 원인을 멈추지 않는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이 멈춰지지 않고 계속해서 갈구하는 상태’를 가장 큰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갈애(渴愛)라고 한다.

멈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갈애를 멈추는 것이다.


예를 들면, 흙탕물이 담긴 투명한 비커가 있다고 보자. 비커에 담겨있는 흙탕물에서 흙 알갱이는 감각, 감정, 생각이고, 물은 욕망이다. 이렇게 흙탕물처럼 뒤섞여 있는 것이 내 마음이고, 비커는 이런 마음을 속박하는 ’나의 한계‘이다.

이 비커가 한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비커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한, 흙탕물은 언제나 탁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마음이 바로 ’갈애(渴愛)‘이다.


멈추기 위한 조건


그러면 이 갈애를 멈추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감각을 멈춰보는 것이다. 외부의 감각적인 자극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이렇게 인지하는 작용은 나를 중심으로 의식이 바깥으로 향한다. 감각의 작용으로 인지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각을 멈추면 바깥을 향하던 의식이 내면을 향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이 내면을 향한 후에야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을 멈춰보는 것이다. 감정은 감각으로 활성화되기도 하고, 생각으로 활성화되기도 하며, 또 다른 감정에 의해 활성화되기도 한다. 먼저 감각을 멈추고 나면, 외부로 향하던 마음은 내면을 향하게 되고, 감정과 생각이 선명해진다. 이렇게 선명해진 감정은 생각과 분리가 가능해진다. 자아와 분리된 감정 그 자체를 알게 된다.


세 번째, 생각을 올바른 사유로 돌리는 것이다. 사실 생각을 멈추는 것은 초보 단계에서는 물론 어느 정도 명상을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생각은 멈추려 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각을 멈춘다는 의미는 그동안 자신을 온전히 둘러싸고 있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보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빠져서,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헤매고 있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전환해 보는 것이다.


네 번째,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다. 감각, 감정, 생각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욕망도 함께 천천히 움직이게 된다. 이것은 움직임이 둔해진 비커 안 흙탕물에서 흙알갱이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과 같다. 흙알갱이가 아래로 가라앉고 나면 윗부분의 물은 어느 정도 맑아진다. 이렇게 되면, 분리된 흙과 물을 제대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감각과 감정과 생각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감각, 감정, 생각과 섞여 있던 욕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욕망이 아닌 본연의 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를 지배했던 타는듯한 목마름과도 같은 갈애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멈추는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것들을 멈출 수 있는가?


감각은 계율을 통해 다스린다.


현대사회에서 계율이란 고리타분한 도덕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청정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계율이 필요한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평생을 살아온 감각적인 습관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감각적이고 일차원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데 감각과 쾌락은 서로 상승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쾌락을 쓰면 쓸수록 감정의 진폭은 커지고, 반대로 이성의 영역인 생각의 크기는 작아진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감정은 격해지고 이성은 마비되어 간다. 문제는 감각적인 쾌락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는 끝이 없지만, 신체의 한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더라도 매일 술을 마시고 육체적 쾌락을 탐닉한다면 젊은 시절에는 버텨질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육체는 점점 상하게 되는 것과 같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감각을 통한 감각적인 쾌락을 잠시 멈춰보는 것은 명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은 집중과 고요함을 통해 다스릴 수 있다.


감각을 어느 정도 멈춘 후에야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감정은 명상이나 선정을 통해 다스릴 수 있다. 특히, 집중을 통한 고요함을 찾는 명상으로 다스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입출식념(入出息念)명상의 하나인 수식관(數息觀)을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들숨과 날숨에 집중해서 호흡에 맞춰 숫자를 세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집중이다. 호흡에 집중함으로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집중하게 되면 감정은 가라앉고 생각은 투명해진다. 그러면 고요함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고요함의 기준점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눈치채게 된다. 그 감정이 분노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고 따라가지 않고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이렇게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감정을 멈추는 방법이다.


사람들에 따라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은 게임을 할 때 집중을 잘하는데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집중과 이 집중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근본적으로 게임과 같은 것들은 자기 감각과 감정과 생각을 통한 쾌락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쾌락에 대한 집중은 먹이에 집중하는 짐승들이 하는 집중과 같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쾌락에 집중하는 것은 욕망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렇듯 욕망에 집중하는 것은 특별한 노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들도 할 수 있다. 명상에서 말하는 집중이란 욕망을 여읜 집중을 의미한다. 욕망적인 집중이 아니라 비욕망적인 집중을 의미한다.


생각은 지혜에 해당하는 올바른 사유를 통해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멈출 방법은 없다. 무념의 상태에 들더라도, 집중을 통해 생각을 한 곳에 몰아 놓은 것이고,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생각을 바르게 할 수 있는가?


올바른 사유는, 감각과 감정을 멈추고 나면, 내면의 중생심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중생심에 휘둘리지 않는 부동심이 만들어진 후에야, 겨우 올바른 사유의 초입에 들어갈 수 있다.

감각에 갇히고 감정에 물든 인간은 세상은 물론 자신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으므로, 올바른 사유를 할 수 있는 기초가 약할 수밖에 없다. 사유라고 생각한 것이 쉽게 감각에 흔들리고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부동심을 만들고 나면, 이런 감각과 감정에서 어느 정도 초연할 수 있다.


욕망은 감각, 감정, 생각이 잦아들면, 같이 잦아들게 된다.


감각, 감정, 생각이 잦아들면, 욕망의 실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욕망에 대한 집착인 갈애(渴愛)가 약해진다. 결국, 모든 번뇌는 욕망에 대한 갈구, 즉 갈애(渴愛) 때문에 생겨난다. 감각을 멈추는 것도, 감정을 멈추는 것도, 생각을 쉬는 것도, 그리고 욕망을 멈추는 것도 이 갈애를 멈추기 위한 것이다. 감각, 감정, 생각, 욕망 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집착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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