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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an 24. 2023

18. 하심(下心)과 참회(懺悔)

- 수행의 두 바퀴

요즘 우리는 명상을 한다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현대적인 명상이 대중화되기 전, 불가(佛家)에서는 수행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좌선과 절이 있고, 종교적인 방법으로는 기도가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수행법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많은 수행법들 중에서 어떤 수행법들이 좋은 것일까?      

수행법들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지향점으로 가는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심(下心)과 참회(懺悔)라는 두 개의 바퀴이다. 이 두 개의 바퀴는 중생심을 바로 보게 해주기 때문에 에고(ego)가 일어날 틈을 주질 않는다. 이 두 개의 바퀴는 양축이 되어 수레를 앞으로 몰아 깨달음으로 나가게 하는 필수적인 장치이다. 그래서 하심과 참회는 승려가 되기 위해 절집에 들어가는 사람들 – 행자(行者:예비스님) - 에게는 필수적인 행동준칙이 된다. 그러면 왜 이 두 용어가 그토록 처음으로 스님을 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할까?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나타나는 마음의 관성(업:業)이 일어나지 않도록 돕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하심(下心) 미래에 일어나는 마음의 관성에 관여한다.

말 그대로 하심은 마음을 아래도 향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의미한다. 단순한 겸손과는 다르다. 겸손은 자기 생각은 그대로 둔 채, 상대에 대해 자세나 태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즉, 겸손은 겉으로 표현되는 행위이다. 이에 반해 하심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넘어 자기 생각을 쓰지 않고 선배나 스승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통해 나타나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스스로 하지 않고 타인에게 맡기는 행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옳고 그름 이전, 혹은 분별심 이전의 무판단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생각과 행동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이전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것인가?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식이 마음의 관성이고, 업이며, 운명을 결정해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그대로 두고 수행을 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보다 더 의미가 없다. 하심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해준다. 불교라는 종교적인 큰 틀에서, 삶의 방식을 개인적인 방식에서 집단적인 성스러운 방식으로 바꿔 살아보는 것이다. 진정한 하심을 하지 않은 수행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더 고집하게 되고, 자신은 수행을 하고 좋아진다고 느끼지만 사실상 자신을 또 다른 마음의 감옥에 가둬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참회과거에 일어난 마음의 관성에 관여한다.

현재의 나를 만든 과거의 나를 돌이켜서 고치는 방법이 ‘참회’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는 반성이 있다. 하지만 참회와 반성의 큰 차이는 반성은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뉘우치는 정신적인 행위라면, 참회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반성해서 현재의 나를 정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참회는 이기심과 나태함으로 일으켰던 마음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하여 참회하는 것이다. 스스로 반성을 넘어 다시는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각오하며 다짐하는 것이 참회인 것이다.

참회의 어려운 점은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돌이켜봐야 한다는 점이다. 참회를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신을 돌이키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회는 일반적인 기억을 토대로 시작하지만, 참회가 거듭될수록, 자아에 의해 왜곡된 기억들과 내면의 깊고 깊은 곳에 숨겨둔 채 드러내기 싫은 기억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한 행위에 대해 타인이 받은 상처에 대한 외면의 기억들 등, 참회를 거듭할수록 보이는 과거의 나를 직면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인간은 생각보다 과대 포장된 의식으로 자아를 만들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과연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심과 참회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참회를 통해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현재의 나를 만들면서, 동시에 현재의 내가 만들어갈 미래의 나를 수정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현재와 미래의 나를 모두 바꿔나가는 것이 수행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하심과 참회는 정말 어렵다. 자신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교수행이 일반명상과 큰 차이가 생긴다. 일반 명상은 적당한 자기긍정을 필수요소로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명상이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치유법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심리학 기반의 명상법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난 후, 자기 객관화를 통해 치유하는 방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자기를 그대로 둔 채 나타나는 현상만을 가라앉히기 때문에 언제든 재발할 우려가 크지만, 이 방법을 통해 일반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다. 이에 반해서 하심과 참회를 통한 자기부정이라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참회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마음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쉽진 않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나’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부정되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마음마저 부정해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자신을 부정하기만 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부정되는 나는 가짜로 존재하는 ‘가아(假我)’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짜 나를 부정해나가다 보면, 저 밑바닥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진짜 나(진아:眞我)를 발견하게 된다. 부정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사는 나일 뿐, 각성한 자신은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하심을 하고 바른 참회를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는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식이다.     

첫 번째로 수행은 기본적으로 깊은 집중을 통해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과 내면 관찰을 통해 번뇌를 정확히 보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방법을 통해 얻은 것을 통해 번뇌를 녹이는 수행이 있다.

여기에서 내면 관찰을 정확히 하도록 돕는 것이 고행이다. 수행은 일정부분 고행을 수반한다. 수행에서 고행이란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자유롭다고 하지만, 육체의 속박에 연결되어있다. 이렇게 연결된 인간의 의식은 육체의 고통에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리고 육체의 고통은 어떤 의식의 속임수로도 피할 수 없다.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고통에 나약해지고 비겁해지는 정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한계를 느껴보는 것이다. 인간이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얼마나 제한적이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또한 그런 약한 존재를 변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 의식장난을 하는지 알게 된다.

사실 모든 수행은 어느 정도의 고행을 동반한다. 수행은 대부분 인간의 육체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행은 인간의 의식을 깨어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몸에 고통을 줄 때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의별 짓을 한다.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기도 하고 의식을 놓고 싶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짓을 해도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하면 고통 속에서는 마음을 꾸밀 수 없고, 가짜 마음으로는 버텨지지 않는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다 보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중생심을 보다 잘 알아챌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선지식이다. 선지식은 단순히 스승을 의미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 지식을 전하고 인품을 닦도록 도와주는 존재를 뜻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선지식이란 제자가 마음공부를 지어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의 힘든 관문을 넘어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지혜와 경지를 같이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실상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말은 하심과 참회를 통해서 자신을 깎아나가더라도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한계점을 스스로 넘어가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수행하는 자신이 그럴 경우는 거의 없다. 이렇게 내 머리가 천정에 닿았을 때 그 벽을 인식시켜 주고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지식이 절대 필요하다.

          



붓다께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변을 여읜 중도의 길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혹자들은 고행은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붓다께서 말씀하신 배경과 이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시절은 인도는 문화의 중흥기로 여러 실천사상가와 실천철학자들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들도 있었고 극단적인 고행주의자들도 있었다. 쾌락주의자들은 윤회를 부정한다. 단 한 번의 생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현실적인 쾌락을 즐기기를 주장했다. 이들은 결국 에너지 고갈과 정신적 피폐로 빠져들게 된다. 이것을 단멸론(斷滅論)이라고 한다. 반대로 고정불변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영혼이 윤회한다고 하는 상주론(常住論)이라고 하며, 이것은 ‘자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 영혼(불변의 자아)의 정화를 통해 해탈한다고 주장한다.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이 고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극단적인 고행을 하게 된다. 붓다께서는 이런 극단적인 고행주의와 극단적인 쾌락주의의 의미 없음을 설파하는 의미에서 양변을 여읜 중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붓다께서도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전에 고행을 한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고행하며 지낸 시기가 나중에 중도와 연기법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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