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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un 21. 2015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

북아일랜드 캠프힐 입성기

"This is not a paradise, but good to live."



북아일랜드에 도착한 날, 듣던 대로 하늘은 음울한 회색빛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데미안 라이스의 쓸쓸한 목소리가 절로 입안에 가득 차는 날씨였다. 운전을 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드문드문 설명해주던 조(Joe)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말했다. 


-바로 저기야


차창 너머로 한쪽 귀퉁이가 구겨진 철제 표지판이 보였다. 돋보기를 들이민 듯 표지판에 새겨진 CAMPHILL이라는 단어가 눈에 쏙 들어왔다. 각오는 했지만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긴장과 설렘, 후회로 뒤범벅된 알쏭달쏭한 감정이 스칠 때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가 한마디 덧붙였다. 


-여긴 천국은 아니야. 하지만 살기엔 꽤 괜찮은 곳이지



교회 종탑이 보이면 지체 없이 버스벨을 눌러야 한다. 버스 안내방송도, 마땅한 정류장도 없는 그곳에 캠프힐이 있었다.


처음 캠프힐 커뮤니티(camphill community)를 알게 된 건 어처구니없게도 디씨****의 호주 관련 게시판이었다. 평소 탐탁지 않아 했던 웹사이트에서 내 앞길을 이끌 단서를 발견할 줄이야. 당시 나는 퇴사를 한 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생각이었다. 생각이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막연한 마음에 매일 밤 워킹홀리데이와 관련된 웹사이트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남반구에서 날아든 온갖 불길하고 희망찬 후기들을 읽으며 내일을 도모했다. 그러던 와중 '해외 봉사활동'이라는 키워드가 담긴 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사회복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종종 까닭 없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갸우뚱한 순간들이 있는데, 이날이 바로 그랬다. 


글쓴이의 말인즉슨, 영국 곳곳에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며 공짜로 거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체의 이름은 캠프힐 커뮤니티. 무엇보다 '공짜'라는 말에 구미가 당겼다. 저축과 퇴직금을 모두 긁어모아도 수중엔 기껏해야 2백만 원 남짓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익명의 (아마도) 남자가 올린 진술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구글을 통해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아뿔싸,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온통 영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캠프힐'을 검색했다. 의외로 이미 이곳을 다녀간 한국인이 꽤 있었다. 캠프힐을 가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는 물론, 캠프힐과 같은 세계 각국의 발렌티어 프로그램을 한국인에게 연결해주는 알선업체까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캠프힐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3~4년 전의 글부터 최근 것까지 꼼꼼히 읽어보니 디씨 게시판에 남긴 남자의 표현은 거칠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문장을 빌려오자면 캠프힐 커뮤니티는 인지학(*anthroposophy)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정립한 발도르프 교육을 기반으로 한 장애인 공동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anthroposophy : 캠프힐에서 지내는 동안 록 게 될 의 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안트로포쏘피를 발음하게 되는 날, 우리는 게 에 한 이다.


어찌 보면 캠프힐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사는 작은 마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곳에는 장애인을 돌보는 전문가들이 상주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캠프힐에 정착해 가족을 꾸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온 세계 각지의 발렌티어들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씩 머물며 함께하게 된다. 발렌티어에게는 먹는 것과 자는 곳이 모두 제공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비는 거의 들지 않는데, 이것은 매우 혹독한 노동력에 대한 댓가일 따름이다. 마냥 공짜는 아니라는 이야기. 


100년 전 학교로 쓰였던 대저택에서 나와 8명의 식구들, 골드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 1년 동안 어깨를 부딪치며 살았다. 
침대에 누우면 달빛이 쏟아지고, 한낮에는 햇살이 머물던 나의 방. 

앞으로의 지질하고 우울한, 때로는 눈부시고 충만한 순간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캠프힐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정보를 풀어보았다. 뜻밖에도 캠프힐에 관한 기억을 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다신 없을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지만 실은 가장 연약한 시간이기도 했으므로. 살면서 가장 많은 악몽에 시달렸고, 처음으로 외롭다는 느낌이 싫어졌다. 


그리고 3여 년이 흘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고서 캠프힐을 담은 사진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추어 보았다. 6월 초 북아일랜드에 도착했던 사진 속의 나는 계절이 무색하게도 보라색 패딩점퍼를 입고 있다. 캠프힐은 그런 곳이었다. 한여름에도 양모 스웨터를 입고, 70세 할아버지와 손녀뻘의 내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곳. 온종일 세수를 하지 않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곳. 모든 '다른'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름 안에서 나는 조금은 편안해졌다.


천국은 아니지만, 살기엔 꽤 괜찮은 그곳. 여기는 캠프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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