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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Sep 07. 2016

반딧불이를 만난 밤

제주 청수 곶자왈

이런저런 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 제주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꽤 오래 전에 끊어놓은 티켓인데다,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차마 취소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그나마도 잠들기 전이나 지하철 출퇴근 길에 인스타그램을 뒤적인 게 전부다. 몇 개의 해시태그만으로도 방대한 정보가

쏟아져나왔지만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마치 거대한 카페촌처럼 보이던 제주. 그나마도 없던 의욕이 더욱 사그라든다. 


오름이나 숲 위주로 검색을 하다 우연히 청수 곶자왈에 관한 글을 발견했다. 그 문장에는 '반딧불이'라는 단어가 함께 놓여 있었다. 마음이 갈급해졌다. 동화 속에서나 훔쳐보았던 반딧불이는 내게 유니콘이나 말하는 토끼같은, 현실의 바깥에 자리한 생명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도 9월까지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청수 곶자왈과 가까운 저지리로 숙소를 예약했다. 


저녁 8시반까지 청수리로 오면 된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서 식사도 거른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로 한편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고 형광봉을 든 마을 아저씨가 사람들을 맞이해주었다. 반딧불이 관람 체험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청수리 마을 주민과 제주전쟁역사평화박물관의 이영근 관장님의 대가 없는 수고만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생각보다 가족 단위의 참가자가 많았다. 피곤한 아이들은 엄마의 팔등에 간신히 매달려 있거나 벌써부터 보채기 시작한다. 서둘러 오느라 저녁을 먹지 못한 나와 남자친구도 지루함에 몸이 배배 꼬여만갔다. 그렇게 캄캄한 주차장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사람들의 얕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반딧불이다."


가로등 근처를 맴맴 돌던 빛 하나가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공기중에 스며든 듯 흔적조차 없다. 찰나였지만 주차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분명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껏 상기된 채 곶자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에는 조명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 깊은 어둠 속으로 향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바닥에 융단처럼 깔린 말똥을 요리조리 피하느라 두려움은 뒷전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여자아이가 자꾸 말똥, 말똥거리며 수다스럽게 구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신나졌다. 구름에 가린 달빛 대신, 나는 앞사람의 소근거리는 목소리와 흰색 원피스를 좇아 걸었다. 어둠 속에서는 흰색이 유난히 밝게 보인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으로 실감했다. 


반딧불이가 나타나는 순간은 신비로웠다. 눈 깜빡할 사이 빈 유리잔에 물이 채워지는 마술처럼, 비어 있는 하늘 위로 밝은 연두빛의 구슬 하나가 또로록 굴러다녔다. '와' 하고 함성이 터졌지만 곧장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은 소리를 안으로 꿀꺽 삼켰다. 거대한 폭포나 광활한 바다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기쁨이었다. 그것은 해변가에서 발견한 예쁜 조약돌과 같았다. 손에 쥔 이 작고 소중한 기쁨을 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대여섯 마리의 반딧불이를 만났다. 하나는 하늘을 절반씩 나눠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어갔고, 어떤 것은 짙은 밤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청수 곶자왈 반딧불이 문의 

http://blog.naver.com/gen1430/220779704201




곶자왈로 들어가 반딧불이를 관찰하는 동안에는 아주 작은 빛과 소리도 방해가 된다. 사진 촬영은 불가능에 가깝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반딧불이 관찰은 1시간 정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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