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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an 03. 2017

우리에게 31일의 시간이 생긴다면

아주 우연한 선택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여느 해와 다름 없이 미래의 나에게 숙제를 내어주기 위해 골똘하던 새해의 첫 번째 일요일 오후. 카페의 한구석에 앉아 나와 A는 서로에게 주어진 숙제가 지켜질만한 것인지 검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를테면 5킬로그램 감량이라든가 일본어 공부, 열띤 문화생활 같은 것들. 사실 이런 류의 항목은 오히려 삭제하는 편이 나았다. 몇 년에 걸쳐 단 한번도 실현된 적 없던 목표는 좌절의 크기만 더욱 키울 뿐이니까.

 

직업과 성향, 성취의 목적 등. 무엇하나 닮은 것 없는 우리는 올해에도 서로 다른 기대를 향해 걸어갈 예정이었다. 프리랜서인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버텨야만 했고, 번듯한 직장인인 A는 퇴사의 유혹으로부터 눈을 질끈 감고 버텨야 했다. 이유는 달랐지만 둘 모두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버텨야’ 하는 신세임은 마찬가지였다.

 

달갑지 않은 새해지만, 다행스럽게도 한줄기 희망의 빛이 아직 우리 곁을 맴돌고 있었다. A가 올해 9월부터 안식월 휴가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한 달씩이나! 유급휴가인데다 휴가비까지 지급된다는 A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서 부디 안식월 휴가를 쓰기 전까지는 회사에서 짤리지도, 그만두지도 말라며 빌고 싶어졌다. A는 설사 관두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 휴가는 챙기고 떠날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물론, 그는 여전히 회사를 성실하게다니고 있다.)




 


한 달간의 휴가 소식은 로또 당첨보다 더욱 기쁘고 짜릿했다. 80만 분의 1 확률에 기대어 토요일 밤마다 일희일비에 시달릴 바에야, 보다 확실한 행복에 기대를 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행책방을 열겠다며 회사를 그만둔 나를 주변에서는 낭만적으로 치장하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람에 가까웠다.


‘일단멈춤’이라는 책방을 시작한 지 2년차가 되었을 때 나는 이 바닥에 미래가 없다고 느꼈다. 정확히는 책방주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말해야 오해가 없을 테다. 상황을 직시한 나는 안식월 휴가를 다녀온직후 책방 운영을 중단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올해의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사정을 구구절절 읊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그랬다가는 지금 이 글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게 될 것이므로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랩탑 화면 위로 구글맵을 띄워놓고서 나와 A는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9월을 상상했다. 한 달 동안이나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한동안 다시 없을 것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앞둔 사람마냥,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동시에 서울에서 가급적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로 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후보지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 파타고니아에서 모레노 빙하 위를 걷는 건 어떨까. 이는 가장 멀고 아름다운 조건에 알맞는 여행지였다. 혹은 바르셀로나에서만 31일을 머물며 현지인을 가장한 여행을 하는 것. 남미에 비하면 가까운 거리였지만 지중해의 햇살에 샤워를 하는 것만큼 쿨하고 섹시한 여행이 또 있을까.



10월의 여름




모험이냐 휴식이냐를 두고서도 여러 차례 설전이 오갔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선택의 와중에 뜻밖의 여행지가 눈에 들었다. 바로 시칠리아였다. 이탈리아 본토의 남쪽 끝,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 자동반사처럼 영화 <대부>의 마피아가 떠올랐지만 알아보면 볼수록 나와 A는 시칠리아에 매료되었다. 아직까지 한국인 여행자가 많지 않은 탓에 ‘미지의섬’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는데다, 저렴한 물가, 맛있는 음식, 지중해, 따뜻한 날씨 등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별다른 이견 없이 우리는 금쪽같은 한 달의 시간을 시칠리아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아직 다녀오지도 않은 이 섬이 벌써부터 마음에 가득찬다.



공중 도시, 라구사



시칠리아에서의 완전한 휴식

 

 

모처럼 흡족한 결정을 내린 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여행 자료를 찾아보려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나와 A가 즐겨보는 <꽃보다 청춘> 시리즈의 방영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번엔 어디를 가려나 했더니 무려 아이슬란드.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지난 <꽃보다 청춘> 라오스 편이 방영된 뒤 루앙프라방이며 방비엥이며 한국인 여행자만 가득하다는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꿈꿨던 그곳. 살인적인 비행기값 때문에 나는 런던에서 아이슬란드로 가는 대신, 파리로 넘어가 시규어 로스(아이슬란드 밴드)의 공연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공연 말미에 결국 울음이 터졌던 밤. 언젠가 꼭 레이캬비크에 가겠다며 설움에 받친 그날 밤이 떠올랐다.


 

1989년으로 기록된 그날의 순간



고맙게도 A는 나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주었다. 대신 여행의 절반만 아이슬란드에 양보하기로 했다. 한달쯤 여유 있게 지내고 싶어도 그야말로 ‘미친 물가’로 인해 10일이 딱 적당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링로드’라 불리는, 아이슬란드의 외곽을 따라 한바퀴를 일주하는 1,300km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꽃보다 청춘>을 시청하는 동안 우리는 셀포스며 게이시르 같은 입에 설익은 단어들을 읊어보았다. 동시에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책과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그랑블루>, <시네마 천국>과 같은 명작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니. 무엇보다 평소 좋아했던 소설가 김영하 또한 시칠리아를 다녀왔다는 사실은 우리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시칠리아에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해 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 김영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9월 중순부터 시작될 우리의 여행은 아이슬란드의 겨울과 시칠리아의 여름을 사이좋게 오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곳 모두 섬으로 이루어진 땅.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혹여나 터지기라도 할까 두려워 나는 마음이 지긋이 가려앉길 기다린다.




검은 해변으로 떠내려온 유빙


<인터스텔라>에서 얼음행성으로 등장한 스카프타펠 국립공원



강처럼 흐르던 오로라와 별,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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