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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an 15. 2017

200시간과 40분의 여유

아이슬란드 (1) : 1500킬로미터, 10일의 여정


공항은 예상보다 훨씬 작고 아담했다. 


한 나라의 수도에 자리한 국제공항치고는 그 위상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유심칩과 렌트카 미션을 실수 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결의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이슬란드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는 실감도 자연히 뒤로 밀려났다. 앞으로 10일간 우리의 안전을 담보해줄 유심칩과 자동차 열쇠를 무사히 손에 쥐고 나서야 우리는 온전히 이 기쁨을 만끽하게 될 예정이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자마자 나와 A가 향한 곳은 면세점이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이제 막 아이슬란드 땅을 디딘 사람들 대부분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곳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갔다. 면세구역에는 아이슬란드 특산품인 양모 제품과 초콜릿, 화장품, 기념품 등이 잔뜩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술뿐이다. 아이슬란드의 주류 가격이 주변 유럽국에 비해 턱없이 비싼 데다, 지정된 주류 판매점에서만 술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일 1맥을 실천하는 A는 아이슬란드산 맥주인 '바이킹' 6캔 한 묶음과 와인을 집어들었다. 술 한모금 마시지 않는 나는 'REYKA'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슬란드산 보드카가 자꾸 눈에 밟혔다. 빙하를 깎아 만든 듯 묽은 하늘빛을 띄는 유리병에는 ICELAND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서울의 방 한켠에 놓아두면 두고두고 기념이 될 것 같지만 짐이 될 것 같아 선뜻 사기가 망설여졌다. 그런데 웬걸, 포장에 현혹된 나같은 여행객이 한둘은 아닌 모양인지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의 보드카를 잔뜩 쌓아둔 채 판매하고 있다. 5개를 살까하다 우선은 3개만 카트에 담았다. 


한국에서 온라인을 통해 미리 계약한 렌트카 업체에 관해서는 후기가 분분했다. 말끔하게 일 처리를 한다는 후한 점수가 있는 반면, 직원이 제 시간에 픽업을 나오지 않아 곤란했다는 난감한 후기도 더러 있었다. 여행 2주 전, 렌트카 업체와 최종 확인 메일을 주고받긴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여전했다. 렌트카 수령은 일종의 스타트 버튼이었다. 이 버튼을 제때 정확히 누르지 못하면 아이슬란드의 일정은 트위스트처럼 꼬일 게 분명하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깟 몇 시간 늘어지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소심한 나와 A는 비행기 착륙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스텝이 엉킨 댄서마냥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러고보면 여행에서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은 언제나 출발 직전이었다. 온갖 망상과 걱정은 숙소 열쇠를 무사히 손에 쥔 즉시 눈 녹듯 사라진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낯선 도시의 거리 안으로 의기양양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공항 밖에 렌트카 직원이 서 있어! 우리가 마지막인가 봐, 얼른 와!"


1001 편의점에서 무료 통화와 SMS 메시지, 1GB 데이터를 제공하는 유심칩을 구입하고 나오던 차였다. A가 한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의 말처럼 먼저 도착한 두 팀의 사람들이 나와 A를 기다리고 있다. 친구로 보이는 세 명의 젊은 여성들과 노부부 커플이었다. 두 개의 캐리어와 40리터짜리 배낭 하나를 마지막으로 트렁크에 실은 뒤 우리는 공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렌트카 회사 건물로 출발했다. 






두 개의 미션을 (아직 차키를 받지 않았으니 정확히는 1.5개이지만) 처리하고 나니 그제서야 숨통이 트인다. 지금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이슬란드의 흐린 하늘과 구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날씨는 화창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크게 실망할 것도 없었다. 이끼인지 풀인지 모를 녹색으로 덮인 평원 위로 차들이 간간히 스쳐지나갔다. 이곳이 아이슬란드임을 증명하는 근사한 풍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200시간하고도 40분의 여유가 남아 있다. 


레이캬비크에서 마주한 현대 자동차 로고는 뜻밖의 반가움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현대차라니' 싶지만 '그래도 익숙한 차가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조금 더 앞섰다. 렌트카 직원과 함께 차량 상태를 체크한 뒤 우리는 함께 온 일행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길을 나섰다. 네비게이션 역할을 할 내 아이폰에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오늘 가게 될 목적지의 GPS 위치를 지도 어플인 맵스미에 저장하느라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렌트카 수령 걱정에 전전긍긍하던 아까와는 달리, 막상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오히려 느긋해진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약해진 틈을 타 우리는 드디어 아이슬란드 링로드 일주를 위한 첫 시동을 걸었다. 1,500킬로미터, 10일간의 여정. 안전벨트를 붙잡은 양 손에 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이 여행이 나와 A의 삶을 뒤흔들만한 계기가 될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몹시 기대됐다.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였음을 새삼 확인하는 아름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혹은, 여행이 끝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각자 캐리어를 끌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될까.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지금과 달라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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