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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Apr 10. 2018

그해 여름의 명왕성

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가끔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책방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이 인적 드문 마을의 정류장에 하차한 유일한 승객처럼 느껴지곤 했다. 부연 먼지를 날리며 자리를 뜬 버스 안에는 동일한 목적지로 향하는 승객들이 앉아 있다. 홀로 남은 나는 이제부터 오롯이 자력으로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안전하게 잠들 수 있는 장소를 찾고, 배를 곯지 않게 끼니를 때우고, 방향을 잃지 않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차가운 밤, 온기를 나누며 끌어안을 친구 하나 없는 완벽한 혼자인 상태. 내 갈 길 가겠다며 기세등등하게 회사라는 버스에서 내렸지만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창덕궁 근처에서 드로잉과 캘리그래피를 가르치는 하정 씨가 수강생들과 함께 책방에서 전시를 열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구김 없는 낙관으로 자신의 자리를 단단하게 일구는 그녀의 행보를 응원하던 나로선 더없이 반가운 제안이었다. 이제 막 캘리그래피를 시작한 이들답게 전시 주제는 ‘일단 쓰다’. 어느 동사 앞이든 ‘일단’이라는 부사를 붙이면 경직된 어깨가 풀리면서 덩달아 마음가짐도 느슨해진다. 뒷일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당장의 순간에 집중한다. 


일단 해보자. 일단 저지르고 나면 뭐라도 남겠지! 







오프닝 파티와 함께 전시는 시작됐다. 열댓 명 남짓한 팀원과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니 가뜩이나 좁은 책방이 더욱 발 디딜 틈 없었다. 새로 장만한 에어컨으로도 열기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손부채를 부쳐가며 전시 소개를 간신히 마쳤건만 어쿠스틱 공연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더위와 소란으로 어수선한 그때, 누군가 차라리 책방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마침 바깥은 바람이 살랑대는 초여름 저녁이었다. 


오늘을 위해 급히 합을 맞춘 바이올린과 멜로디언, 보컬 멤버들이 책방의 낮은 돌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연주자들과 마주 보는 삼거리에 서서 책방 주변을 둥글게 에워쌌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야외무대가 완성됐다. 


경쾌한 멜로디가 골목으로 퍼지자 무심히 거리를 오가던 주민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연에 귀를 기울였다. 화려한 조명 대신 백열전구 하나로 불을 밝힌 무대는 함께한 이들의 목소리와 박수로 살뜰히 채워졌다. 혼자라면 결코 이뤄낼 수 없었을 다정한 풍경이었다.


빌 브라이슨의 책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는 우주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999년 2월에 국제천문연합이 명왕성이 행성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좋은 소식이다. 우주는 크고 외로운 곳이다. 가능하면 많은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까치글방 


일단멈춤을 운영하며 좋은 이웃들을 만났다. 대개는 책방 운영자와 손님으로 시작된 평범한 만남이었다. 대화의 물꼬가 터지고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우연은 시작된다. 알고 보니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이고, 여행작가이고, 디자이너이고, 싱어송라이터인 그들에게 나는 함께 재밌는 일을 벌여보자며 슬며시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는 그렇게 흔쾌히 서로의 이웃이자 동료가 되어주었다. 


버스가 떠나고 혼자인 줄로만 알았던 낯선 정류장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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