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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Apr 24. 2018

매출 대신 데이트

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전에 다니던 회사 대표는 “자나 깨나 기획 생각만 해야 한다”는 충고를 서슴지 않는 워커홀릭이었다. 툭하면 업무 지시가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는데, 진동 소리에 깨 시간을 확인해보면 캄캄한 새벽인 경우가 허다했다.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참다못한 나는 결국 회의 자리에서 새벽에 메시지를 보내지 말 것을 요청했다. 자신이 잊기 전에 보내는 것뿐이니 괘념치 말라던 그는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조차 상대에게 엄청난 피로감을 안긴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날 이후로 바뀐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나 깨나 일 생각만 하는 대표와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J는 내가 SNS 중독자가 됐다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가끔은 짜증을 냈다. 나는 그를 옆에 둔 채 휴대전화 너머의 고객과 쉼 없이 대화했다. 간만의 외식 자리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란히 침대에 누워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동안에도.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SNS와 블로그를 확인했다. 특히 워크숍 신청과 도서 주문처럼 수익과 직결되는 댓글은 좀처럼 외면하지 못했다. 새벽 1시든 3시든 관계없이 답변을 남겼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블로그는 책방의 유일한 홍보 수단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소리 내어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작은 책방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돈이 들지 않는 통로. 팔로워가 늘고 ‘좋아요’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손님이 당장 느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저들의 마음속에 일단멈춤이라는 이름이 우연히라도 스쳤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 이대역을 지나갈 때 ‘참, 여기 무슨 책방이 있던데’ 하고 떠올릴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이다. 그런 기대로 인해 집착은 점점 더 심해졌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서도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책방 업무를 처리했다. 자연스럽게 일과 생활의 경계가 흐려졌다. 






책방을 시작한 이후 나와 J 앞에는 저녁 없는 삶이라는 커다란 숙제가 놓였다. 우리는 늦은 밤에야 저녁 식사라는 것을 간신히 함께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인스턴트식품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대신 간단하게나마 요리를 했다. 생활감을 잃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었으나 매번 후회했다.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졌다. 겨우 저녁 한 끼 먹었을 뿐인데 자정이 코앞이다. 아침잠이 많아진 탓에 눈을 뜨자마자 책방으로 뛰쳐나가는 하루가 매일 반복됐다. 


회사를 나왔다고 해서 자유분방한 삶이 내 품에 와락 안기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직장인들이 겪는 고충과 불만은 책방 주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일단멈춤의 안녕을 위해 저녁을 담보로 시간을 빌려 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저녁에 진행되는 워크숍이 책방의 주된 수입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뿐이던 수업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속됐다. 자연히 퇴근 시간도 늦춰졌다. 밤 8시면 문을 닫는 평소와 달리 워크숍이 있는 날은 두세 시간 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사람들이 떠난 염리동 골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힌 책방에 덩그라니 앉아 있노라면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보람 대신 쓸쓸함이 앞섰다. 밝은 대낮에는 느끼지 못한 일상의 무게에 덜컥 겁이 났다.


문제는 명확했지만 달리 수가 보이지 않았다. 워크숍 수강료로 벌어들이는 고정 수익을 생각하면 추가 근무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돈에 무지했다. 돈의 속성을 모른다. 순진한 얼굴로 나의 유일한 자산인 시간을 돈과 맞바꿨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르바이트생이라도 두고 개인 생활을 챙기라는 주변의 조언은 속 모르는 소리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회사를 탈출한 뒤 세상의 법칙에 등 돌리며 살 것 같은 내 인생이야말로 돈 앞에서 자주 휘청거렸다.


“괜찮겠어요? 일요일에 사람이 꽤 많은데.”


하루뿐인 휴무일을 월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길 예정이라는 내 말에 퇴근길 책한잔의 종현 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데이트할 시간이 없어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주말이 성수기인 자영업자와 주말엔 쉬는 직장인의 연애는 자주 삐걱댔다. 1박 2일 여행은커녕 J가 책방으로 나와 일을 돕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서만 쉬는 게 신경 쓰인 모양인지 책상도 없이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다. 때로는 꽃 시장에 들러 공간을 장식할 생화를 한아름 안고 돌아오거나, 내가 외출한 사이 홀로 책방을 지키며 손님을 맞았다. 졸지에 무급으로 일하는 매니저 신세가 됐다. 


휴무일을 정할 당시에는 데이트를 할 수 없는 ‘사소한’ 변화가 내게 끼치는 영향을 미처 알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 J와의 평범한 시간을 생략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한 이벤트나 에피소드가 아닌 함께 영화를 보고, 공원을 걷고, 밥을 먹는 일상을 통해 견고해져왔음을. 통장 잔고를 걱정하며 저녁을 헌납하는 미련한 나이지만 더 이상 일요일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세상을 향한 나의 소심한 저항. 매출 대신 데이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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