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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May 01. 2018

나만 모르는 비밀

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나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사람이다. 아껴 쓰지 않으면 금세 피로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넘치는 에너지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형의 사람과 만난 뒤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커튼을 쳐야 한다. 아, 하고 탄식하며 바닥에 드러눕고 만다. 상대의 활기에 맞장구라도 치려면 내가 가진 하루 치 에너지를 몽땅 끌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기억에 따르면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진 나를 데리고 대문 밖을 나서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껌딱지처럼 등에 업힌 채 떨어지지 않으려는 울보. 친척 어른들이 다 큰 성인인 나를 두고 울보라 놀릴 때마다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겁 많고 내성적인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당차고 사교적인 인재를 원하는 사회에서 나와 같은 자기 친화적 유형은 환영받지 못한다. 성격 개조를 시도해본 적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왼손잡이더러 오른손을 쓰라며 강요하는 것 이상으로 억지스러운 일이라는 씁쓸한 교훈만 얻었다. 


‘내성적 성격’이란 틀로 나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수동적이지 않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진 않지만 몇몇과는 꽤 깊은 유대감을 공유한다. 앞에 나서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보지만 막상 닥치면 꽤 그럴싸하게 해낸다. 한때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늦은 사춘기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게 나라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아는 것을 넘어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키지 않는 약속은 잡지 않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겁게 놀 줄 아는 나를 자랑스러워하게 됐다. 여분의 시간 동안 나는 햇볕 아래 식물처럼 가만히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 힘으로 다시 친구를 만나고, 밥을 지어 먹고, 일을 한다. 




나는 책방이야말로 내게 딱 어울리는 일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무어 있을까 싶고, 그저 자리를 지키며 책만 팔면 되는 줄 알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손님은 책을 고르며 저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책방 주인은 그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은 채 묵묵히 제 일을 한다. 그것이 내가 떠올린 이상적인 책방의 풍경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무해한 공간.


얼토당토않은 바람이었다. 일단멈춤을 찾는 사람들의 기대와 목적은 저마다 다양했다. 대형 서점의 북적이는 인파가 싫어 이곳에 온 사람이 있는 반면, 호기심에 이끌려 온 사람도 있다. 책방 주인의 정체가 궁금해서 왔다며 대놓고 의도를 밝히는 이도 심심찮게 나타났다. 


놀랍게도 손님 가운데 몇몇은 이제 막 만난 내게 속마음을 곧잘 털어놓았다. 퇴사를 고민하는 막막한 심정과 첫 배낭여행을 앞둔 설렘과 걱정, 프리랜서로 일하는 어려움 등 각자의 처지를 내게 하염없이 들려주었다. 예고 없이 시작된 대화의 끄트머리에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인사가 따라왔다.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누군가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따뜻한 커피와 마카롱을 건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감격에 젖기보다 ‘대체 왜?’라는 질문을 먼저 떠올렸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감이 당혹스러웠다. 알고 싶지 않은 고민을 떠안은 기분이 드는 동시에 상대의 솔직한 고백에 부응해야 하는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처음부터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으로 책방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새어 나오고 만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대체 책방의 무엇이 굳게 닫힌 입을 열도록 만든 것일까. 혹시 서가에 꽂힌 책들이 무언의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나만 모르는 책방의 비밀을 손님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겨울이 물러서자 보드라운 잎을 틔운 로즈마리를 큰 화분에 옮겨 심는 사이 한 손님이 책방으로 들어섰다. 20대 초반의 학생으로 보이는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도 되겠냐며 내게 물어왔다. 의아했지만 부쩍 따뜻해진 날씨 탓이려니 싶어 이내 의심을 접었다. 몽롱한 표정의 그녀는 책은 펼쳐 보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분갈이를 하는 내내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어쩐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망설인 듯한 그녀가 이윽고 말문을 뗐다. 


“잠시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예상 밖의 전개에 나도 모르게 “네?” 하고 큰 소리가 나왔다. 다행히 그녀의 입에서는 조상신 대신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괴롭히는 연애 문제에 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뜻밖의 상담 요청에 혼란스러웠지만, 모른 척하기엔 그녀의 표정이 몹시 절실해 보였다. 덕분에 연애에 서툴렀던 스무 살의 나를 아주 오랜만에 소환했다.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이 모든 게 봄이기에 가능한 일 같았다. 


그녀가 돌아간 뒤 나는 젖은 낙엽처럼 쓰러져 앉았다. 수십 명의 손님을 동시에 응대한 직후처럼 기진맥진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리도 살갑지 못한 내가 그저 책방 운영자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이곳이 책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신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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