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책방 일단멈춤 소멸기
퇴근을 앞두고 일일 매출을 정산했다. 책방의 살림 규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시간. 외면하고 싶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엑셀 파일에 기록한 금액을 계산기에 하나씩 입력할 때마다 숨이 흡 하고 멈췄다가 이내 긴 한숨이 터졌다. 안도, 탄식, 실망, 기대, 비아냥. 그 외 이름 붙일 수 없는 영문 모를 감정들이 공기 중에 섞였다. 1만 2000원, 3만 원, 1000원, 1200원.... 돼지 저금통에 잔돈 모으듯 한 푼 두 푼 쌓은 돈으로 여태껏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매출은 마치 신이 던진 주사위 놀이에 의해 결정되는 듯했다. 오늘도 허탕이구나 싶다가도 10만 원어치 책을 현금으로 구매하는 손님이 등장하면 그날은 ‘억수로’ 운이 좋은 하루로 마무리됐다. 유난히 매출이 저조했던 어느 달의 마지막 날, KBS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속으로’ 팀에서 책값으로 30만 원가량 결제해준 덕분에 평균 월수입을 맞출 수 있었다. 반대로 종일 손님이 끊이질 않았건만 매출이 바닥을 치는 날도 허다했다. 엽서만 팔리거나 빈손으로 돌아간 손님이 많은 날이 그렇다. 오래 버티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평소보다 더욱 의욕적으로 일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더 높은 매출을 보장하진 않았다.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보다 폭우가 쏟아지던 목요일 오후의 매출이 두 배 이상 높았던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매출에 관해서만큼은 도무지 예측과 요령이 끼어들 틈이 없다. 가끔은 하늘의 누군가가 부디 주사위를 제대로 굴려주시길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핑계일 뿐 이 모든 심각한 상황이 나의 무능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결론에 자주 이르렀다.
매일 저녁 마주하는 숫자는 하루 동안 흘린 나의 땀과 노력, 능력을 평가하는 점수처럼 느껴졌다. 슬렁슬렁 요령을 피우든 밥 먹듯 야근하며 최선을 다하든 변함없는 월급을 받던 직장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일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 이 단순한 경제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지금의 삶이 나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일단멈춤을 시작한 뒤로 주 6일, 하루 평균 9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다. 그렇게 벌어들인 매출에서 월세와 각종 세금, 도서 구입비, 워크숍 강사비, 위탁 수수료 등을 제하고 나면 60~80만 원 남짓의 순이익이 손에 남았다. 2016년 최저임금 6,030원.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하는 근로자의 임금 1,260,270원보다 못한 액수다. 책방으로 예전만큼의 돈을 벌겠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적게 벌고, 적게 일하자. 초과근무에 시달리며 개인 시간을 뺏기는 상황을 감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꾸준히 습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막상 공간을 열고 보니 무엇 하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책방은 작업실이 될 수 없었다. 여느 직장이 그렇듯 그저 일터일 뿐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은 손님을 응대하고, 행사를 기획하고, 입고 처리가 우선인 운영자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글에 집중할 정신적 여유 따윈 허락되지 않는다. 책방 일에만 오롯이 매달려야 월세를 밀리지 않을 만큼의 수익을 내고 내일도 모레도 무탈하게 책방을 열 수 있었다.
일단멈춤의 인지도가 쌓이고 안정기에 들어서면 ‘돈을 벌 수 있는 일’보다 ‘돈은 안되는 일’에 조금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요원한 바람이었다. 책방이 순조롭게 굴러갈수록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안정된 속도를 유지하려면 잠시도 한눈을 팔아선 안 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버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보람은커녕 차츰 나아질 것이라는 처음의 기대조차 이제는 사그라들었다.
평소 즐겨 읽던 매거진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에디터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자격 요건을 읽어보니 딱히 결격 사유는 없었다. 평일엔 회사에 나가 월급을 받고 비정기적으로 책방을 열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일주일 내내 만약의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봉책인 걸 알면서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 싶었다.
요즘은 매일 돈에 대해 생각한다. 살면서 이렇게 돈 궁리를 해본 적 있나 싶을 만큼 골똘히.
출근길 카페에 들러 아이스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 할지, 카누 두 봉을 뜯어 우유와 얼음을 부어 마실지를 두고 갈등할 때마다 그 생각은 더욱 집요해졌다. 나는 카누로 만든 아이스 카페라테를 좋아할 뿐 아니라 맛있는 제조 비율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누를 고르고 싶진 않았다. 카페에서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지만, 카누로 만든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시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잦아졌다. 마지못한 결정이 쌓일수록 얼굴 없는 원망의 대상이 하나씩 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