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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ul 01. 2015

캐슬린, 캐서린, 케이틀린

캠프힐 (2) - 이름에서 시작해 이름으로 끝나는 하루

캠프힐에서의 첫 번째 난관은 엉뚱한 데서 찾아왔다. 바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을 단번에 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름은 지나치게 섬세했다. 바람이 어디에 닿느냐에 따라 이름의 모양새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목구멍과 입술의 움직임도 조심스러웠다. 나는 분명 '소피아'라 말했는데 소피아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피'를 발음하는 입술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였다. 


하지만 최악은 다른 데 있었다. 캐슬린(Cathlean)케이틀린(Caitlin)캐서린(Catherine) 사이에서 나의 입천장과 혀끝과 목구멍은 늘 갈피를 잃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무렇게나 뱉어버리고 마는데, 그때마다 케이틀린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반면, 한국인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많은 캐슬린은 눈치 껏 이름을 캐치해주었다. 캐서린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늘 내 목소리에 반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았다. 


다른 경우지만, 여러 사람이 똑같은 이름을 쓰는 바람에 우왕좌왕한 일도 잦았다. 캠프힐에는 유독 '존(John)'이 많았다. 존 맥기븐, 존 밋첼, 존 어쩌구, 존 저쩌고 등등 4명의 존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성까지 외워야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존이 속한 워크숍이나 집의 이름으로 그들을 구분했다. 


- 이따 존이 점심 먹으러 오기로 했어

- 존? fairy grove에 사는 존?

- 아니. 베이커리에서 일하는 존 말이야




아침마다 일했던 스토어(Store)의 메인 테이블에는 장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면 나는 장부에다 그들이 구입한 물품과 함께 이름을 일일이 적어야 했다. 현금을 주고받는 대신 이름을 기록해두었다가 매달 정산을 하고 각자의 계좌에서 차감되는 구조였다. 


스토어에서 일한 지 반 년쯤 지난 무렵부터는 수다를 떨며 신제품을 추천할 정도로 여유롭게 장부를 기록했지만, 초반에는 뭉크의 절규 속 주인공의 얼굴을 하고서 허덕거리기 일쑤였다. 오죽 급하면 이름을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휘갈겨 썼을까. 매번 이름을 묻는 게 민망해 장부에다 얼굴을 그려 넣은 날도 있었다는 사실은 글을 쓰는 도중에 문득 떠올랐다. 


라운더리(Laundery)는 한술 더 떴다. 집집마다 나오는 모든 세탁물을 모아 빨래하는 라운더리에서는 세탁부터 건조, 빨래 개기, 다림질, 배달까지 전 과정을 책임졌다. 포인트는 보송보송하게 마른 빨래를 곱게 개어 분류하는 일이다. 양말이든 러닝셔츠든 사각팬티든 장애인들이 입는 모든 옷에는 마치 상표처럼 '이름표'가 붙어 있어 이것을 보고서 라운더리의 한쪽 벽면에 설치된 각 집의 선반에 채워 놓아야 했다. 빨래의 주인과 그 주인이 사는 집을 매칭 해야 하는 고급 스킬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 작업이 익숙해지다 보면 그 혹은 그녀와 인사할 때마다 그들의 너덜너덜한 속옷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때가 찾아오는 데 이상야릇한 감동이 바람처럼 스치곤 했다. 


어찌 보면 캠프힐의 생활방식은 구식에 가깝다. '요즘 같은 세상에'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대부분의 것들이 사람 손을 타야지만 마무리된다. 그래서 더더욱 이곳의 일상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데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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