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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May 19. 2020

나의 3년차 선배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의 '랜선' 동료들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의 북토크를 다녀왔다. 매일 한 권의 도서를 기록하는 형식의 이 책은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서효인 시인, 박혜진 문학평론가가 함께 썼다. 재밌는 건 두 사람의 독서일기에 녹아든 직장인으로서의 면모다. 출판사라는 배경만 다를 뿐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과 고민이 곳곳에 담겨 있다. 한 인터뷰에서 서효인 시인이 밝힌 소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꼭 책을 좋아 하는 사람, 다독가나 애독가만 이 책을 보실 게 아니라 직장인분들도 보시면 좋겠어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본문은 알록달록 화사해져 있었다. 연필과 노란색 모나미 플러스펜, 푸른빛 잉크의 만년필. 때마다 손에 잡히는 필기도구로 밑줄을 그었다. 아무런 표시 없이 귀퉁이만 접힌 페이지는 지하철 통로에 서서 읽었다는 흔적.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다시 후루룩 넘겨 보니 선배 서효인이 후배 박혜진에 대해 쓴 문장에서 나는 자주 흔들린 듯했다. 독자 행사에서 진행을 맡은 후배의 한층 발전된 말솜씨를 지켜보며 “동료의 반짝임에 내가 괜히 으쓱해진” 대목, 젊은평론가상을 받은 후배를 위해 축사를 하게 된 것을 두고 “이토록 대놓고 혜진 씨를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다니, 조금 들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선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이토록 다정한 선배가, 동료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다니 신기했다. 그래도 가끔은 투닥투닥 말이 오가다 진심이 비껴가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동료 없이 일한 지 만 4년이 됐다. 외롭지 않냐는 주변의 염려도 여전하다.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혼자인 상태가 프리랜서 생활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이토록 평온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지금이 만족스럽다. 눈치 싸움에 끼어 새우등 터질 일도,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같다 고 믿었으나 온도 차가 클 때 우리는 문득 외로워진다. 


프리랜서는 일하는 동안 자신의 비위만 잘 맞추면 된다. 점심에는 뭘 먹을까, PMS(월경전증후군)가 심상치 않으니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까, 하늘이 맑게 갠 김에 카페로 외근을 나갈까. 오직 한 사람의 요청에만 귀를 잘 기울이면 하루가 무사하다. “다 됐고, 오늘은 째자!” 서글픈 자아가 외치면 긍정을 관장하는 자아가 “좋지!” 하고 쿵짝을 맞춘다. 하지만 내가 나라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지점도 있다. 제아무리 높은 자존감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내적 파이팅’은 쉽게 바닥 나기 마련이니까. 자가 동력만으로 에너지를 채우는 데 힘이 부친다. 


혼자로도 충분한 마음과 혼자여서 불완전한 마음. 그 사이의 모호한 간극이 혼란스러울 때 나는 트위터에 접속한다. 취향과 관심사가 적극 반영된 나의 타임라인은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들이 흩뿌려 놓은 혼잣말로 가득하다. 그들 중에는 저자나 편집자, 번역가 같은 출판계 종사자만이 아니라 디자인, 웹툰, 영화 등 타업계에 속한 프리랜서, 카페와 식당을 운영하는 개인 사업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따금 나는 단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프리랜서 트친들이 꼭 ‘3년 차 선배’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앞에서 길을 터 주는 동시에 후배의 자잘한 실수를 챙겨줄 정도의 여유가 생긴,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은 딱 3년차 선배. 이들의 조언은 현실적이어서 귀하다. 쉽게 위로하려 들지 않되 적재적소에 알맞은 충고를 건넨다. 클라이언트와의 논의 사항은 반드시 이메일로 증거를 남기는 실무 기술도, 서로의 타임라인에 기운을 북돋기 위해 고양이 사진을 리트윗하는 센스도 모두 3년 차 선배들에게서 배웠다.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며 일하는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 아니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지켜봐 온 트친의 빛나는 시기를 목격할 때가 있다. 저술업자인 나로서는 갓 출간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입소문을 타고 회자되는 경우를 의미할 테다. 성취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이룬 트친을 보며 나는 기꺼이 축하의 하트를 누른다. 부러움과 질투는 애써 부정하는 대신 하룻밤 사이 누그러지길 기다린다. 저들의 성취가 나의 성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30~40대 여성이자 기혼자일 때 나는 보다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한발 더 가까워진다. 아주 조금 안도할 수 있게 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감히 동료라 부를 수 있을까. “같이 일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사소한 움직임, 이를테면 모종의 ‘발전’을 발견하는 사이가 된다는 뜻과도 같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SNS 에 대놓고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랜선 너머로 전달되길 바라며 되도록 크게 말하려고 애쓴다. 다행히도 요즘은 응원하고 싶은 책들이 이토록 쌓여 가고 있다. 


같이 일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사소한 움직임, 이를테면 모종의 ‘발전’을 발견하는 사이가 된다는 뜻과도 같다. 이것도 최소의 발견일까. 동료의 반짝임에 내가 괜히 으쓱해진다.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난다 




도서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의 본문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전문은 종이책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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