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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Sep 13. 2022

관계에 대한 고찰

관계의 성립에 대하여

설날. 정확히는 설 전날 있었던 일이다.

우리 집은 따로 큰집에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 할머니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따로 어디를 가지 않더라도 명절은 항상 바쁘다.

  엄마는 거의 홀로 제사 음식을 직접 다 만든다. 만들어놔도 다 먹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 몇 가지 전 종류는 사자고 말해도, '그래도 제사 음식'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직접 만든다.  나를 포함한 삼 남매가 손을 더한다 해도, 기껏해야 단순 업무들(전 부치기, 물건 옮기기, 잡채 섞기 등) 외에 요리의 영역에는 손대기 어렵다.  차마 내가 하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도 않고, 당연히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엄마는 전 재료 손질 중, 우리는 전을 부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들어오시면서 고기를 사 오셨다. "어멈이 고생이 많다. 애들 고기 구워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한마디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제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집은 꽤나 보수적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 엄마의 고생은 당연했고, 우리의 어설픔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고생했다고 한 말은 진심이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엄마의 노고를 알고 계시고, 고마움을 표하신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관계의 성립에 대한 생각을 했다.






'관계 자체에 특정한 역할(책임, 또는 행동 등)이 정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생각 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시아버님과 며느리의 '가족 관계'를 하고 있고, 며느리는 집안일의 모든 것(이 경우에서는 제사 음식 준비 총괄)이 역할로 정해져 있다.  엄마가 집에서 며느리(또는 엄마, 아내) 라는 이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이름에 주어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사 준비를 엄마와 우리 남매가 함께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이미 엄마의 역할이라서 우리가 돕는 형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관계의 성립은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한다. 태도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늘 변한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 예를 들어, 엄마가 집안일을 총괄하는 게 당연한 관계라면, 내가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것은 '돕는' 형태가 된다. 여기서 내가 바쁜 상황이 되면 설거지나 빨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뀔 것이다.


  상황과 태도가 바뀌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막말로, '#엄마 고마워' 해시태그 첼린지 같은 게 SNS에서 유행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장 집안일의 뭐라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예로, 나는 남사친 여사친에 대한 관계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랑 친한 여자 사람 친구(본인의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로 대입하기. 나는 남자.)가 있을 때, "얘가 무슨 여자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친구'라는 관계의 역할과 '여자'라는 관계의 역할을 정해놓은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그 친구가 혹여라도 '그' 성별로 인식될 만한 '상황'이 생긴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태도'를 보일 확률이 높다.

  관계에 정해진 역할은 없다. 그냥 내 친구가 그 성별을 가진 것이다. 여자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나와 성별이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친구가 여자인 것이다.   "이 친구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라는 질문도 어이가 없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여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이런 생각들을 했다고 해서, 당장 할아버지가 잘못됐다느니, 지금까지 다 잘못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과거에 그래왔던 것들이다. 이것들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엄마한테 말했더니, "그러니까 빨리 결혼해서 며느리 데려와"라고 장난 식으로 얘기했다.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많이 하고, 나부터 바뀌려고 부단히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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