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호 Apr 23. 2018

극한(極限) 마감 후 극한(極寒) 휴가 - 순천|통영

1802 순천-통영 #0


1.


유난히도 추운 날씨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 두꺼운 옷을 입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행인이 프레임 안에 있을 때만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혹독하리만치 쌀쌀한 계절임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 날씨를 헤치고 취재하러 다니는 건 포토그래퍼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디터의 책무이기도 하다. 2018년 2월의 문턱에서, 팀원들과 함께 혹독한 을지로의 겨울을 누비며 만들어 낸 책 한 권을 인쇄소에 맡긴 나는 되려 그에 못지않은 혹독한 추위 속으로 길을 나섰다.


나란 사람이 늘 그렇듯 휴가 계획은 즉흥적으로 세워졌다. 금요일 저녁에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닿기 전까지, 금쪽같은 연차가 이틀이나 남아 있었다. 별다른 계획 없이는 침대 매트리스와 함께 물아일체의 도를 탐구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구미가 당기는 도시에 하루씩 머무르며 정처 없이 걷기로 했다. 북적이지 않는 도시, 가급적 서울과 먼 도시, 인간적인 라이프스타일이나 건축물, 상점 등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는 도시, 가급적 전라도에서 한 곳, 경상도에서 한 곳을 방문하여 지역을 안배할 것. 일련의 선정 원칙에 입각하여 고심한 결과 순천-통영-김해공항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자연스럽게 완성되었다.



2.


서울에서 출발하는 KTX를 예약하고 탑승할 때면 서울역 출발과 용산역 출발을 혼동하는 실수를 반복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밤늦도록 캐리어에 짐을 채우기 바빴던 나는 네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집을 나섰다. 이제 막 동이 트는 거리에서 반쯤 잠에 취해 있던 나는 서울역을 경유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숭례문쯤 지났을까? 으레 또 속은 걸 깨닫고는 스마트폰을 꺼낸 뒤 용산역까지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이번만큼은 1호선이 멀쩡하길 기원하며 서울역 지하 승강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승차 플랫폼을 잽싸게 확인하고, 계단을 뛰어오른 뒤 다시 내려갔다. 열차 출발 2분 전, 거친 숨을 몰아쉬며 KTX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각성 상태에 이른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말똥했다.



3.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는 KTX를 이용할 때면 나는 항상 순방향 우측열 창가 좌석을 예매한다. 몇 가지 풍경을 감상하기 좋기 때문이다. 먼저 한강철교를 건널 때면 철골 트러스 사이로 아침 햇빛을 받아 따스하게 빛나는 63빌딩의 유리 외벽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노들로와 올림픽대로 위 수많은 차들이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도시여 안녕” 오글거리지만 감상적인 멘트를 하나 꺼내어 유리창에 날려 보내고는 저 멀리 다가오는 노량진수산시장 건물에 시선을 고정한다. 구운몽, 매트릭스, 알약과 선녀, 신 수산시장과 구 수산시장. 잡념을 더듬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서울이란 복잡하고도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다.


광명역을 지난 KTX 경부선 열차가 화성, 평택을 지날 때면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와 내키는 대로 흐르는 듯한 개천이 보인다. 이쯤에서는 번잡한 빌딩의 덫에서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는 동시에 오늘 날씨를 가늠해볼 수 있다. 대도시의 인공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여백이 많아 구름과 햇빛을 담은 하늘이 잘 보이기도 하고, 기묘하게도 대개 이 지점의 날씨가 목적지의 날씨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익숙한 도시, 익숙한 집을 나선다는 건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변수의 바닷속으로 뚜벅뚜벅 발을 내딛는 행위이다. 나는 기차에서 순천 지도를 살펴보았지만, 행여 다른 역에서 내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4.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들판 사이로 열차는 미끄러져 나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던 나는 나의 여행길이 조금은 낯선 공기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환영을 보았다. 전주, 임실, 남원, 구례. 소설 속 주인공처럼 후덥지근하며 짠 내 나는 공기가 나를 짓누르진 않았지만, 노고단을 넘어 세차게 불어온 칼바람이 섬진강 위를 훑고는 빙빙 휘감아 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늦겨울의 풍경과 달리 조용하면서도 따스한 기차 안이 유독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던 그 순간. 안내 방송이 다시 나를 현실로 떠밀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순천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Coming Up


순천 - 아랫장, 행동/금곡동/영동, 문화의거리, 동네인포집, 그냥과보통, 바구니호스텔

통영 - 서호시장, 봄날의책방, 잊음, 커피로스터스 수다/강구안, 서피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