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호 May 01. 2018

산다는 건 - 순천 아랫장

1802 순천-통영 여행 #1


순천역과 가까운 숙소 앞으로는 동천이 흐른다. 아니, 정확히는 얼어붙은 수면 아래로 몰래 흐르고 있었다. 강물의 살갗을 모조리 굳혀버린 차가운 바람 앞에 잠시 고개를 들어 숙소의 외관을 감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나는 야심 차게 챙겨 온 니콘 FM2 카메라에 필름을 넣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살결이 얼어붙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던 순간에도 무언가에 취한 듯 추위를 잊은 나 자신의 인내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진을 찍겠다는 강렬한 일념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주인에게 양말을 받은 도비의 해방감이었을까? 어쩌면 낯선 풍경과 낯선 분위기, 그리고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날씨 속에서 나는 일종의 각성 상태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거목순대국밥


동트기 전에 출발한 탓인지 부쩍 허기가 졌다. 캐리어를 맡기기 위해 숙소에 들렀고 맛집을 적어둔 지도를 살펴보다가 가까운 시장 안에 순대국밥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세 정보를 훑어보기도 전에 나는 이곳에서 맛있는 아침을 먹을 수 있음을 직감했다. 보통 전통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영업을 시작하므로 상인을 위한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많다. 그리고 손님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영업하는 식당도 많은 시장에서 맛집으로 꼽히는 곳이라면 적어도 식당이 갖춰야 할 덕목을 두루 충족하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 토종 한국 입맛인 사람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얻게 된 변변찮은 통찰력이랄까.



그러나 나의 발목을 붙잡은 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밥이 아닌 엄청난 인파였다. 묵직한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인도를 점거한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발걸음이 유독 빠른 편에 속하는 나는 본의 아니게 빼곡하게 늘어선 행렬의 리듬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이들의 걸음이 유난히도 느린 건 행인 대다수가 나이 지긋한 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길이 곧 장터요, 장터가 곧 마당이었다. 그야말로 왁자지껄한 난전. 손님들은 쉴 새 없이 도로를 따라 펼쳐진 좌판을 훑어 나갔고, 풍로를 품에 안은 상인들은 눌러쓴 모자를 고쳐 쓰며 손님들과 눈을 맞추기 바빴다. 순천 아랫장. 동천의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 시장의 이름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시장을 낭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다.


요즘에는 시장 상인과 흥정하고 가격을 낮추는 행위에 굳이 힘 뺄 필요 없이 이커머스 서비스의 쿠폰, 포인트, 멤버십 할인을 이용하면 손쉽게 정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게다가 상인의 시연이나 점원의 안내 없이도 인터넷을 잠시 검색하면 상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심지어 지갑에 현금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형 화폐가 소멸하는 시대에도, 전통시장 노점에서는 여전히 지폐가 아니면 계산을 할 수 없거나 카드 계산을 하려고 할 때 눈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소위 시장 활성화 정책이라는 명목 아래 시행되는 진흥책을 보고 있노라면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소비 방식의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과연 현대인이 뜨거운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없어 전통시장을 찾지 않는 것일까? 젊은 감각을 지닌 가게가 없어 2~30대가 전통시장을 찾지 않는 것일까? 사실 전통시장 청년몰보다는 오히려 지역 내 대세 상권에서 가장 세련된 상점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그리고 런던 노팅힐의 포르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앤틱 소품을 찾는 이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련의 사례를 통해 미뤄볼 때 일단 아케이드부터 세우고 청년몰을 들여보자는 정책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장은 그대로 소멸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가? 나는 본질적인 문제점과 하등 연관이 없는 개선책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할 뿐, 한편으로는 전통시장의 면면에서 현대 유통 체계가 갖지 못한 장점과 가능성을 종종 발견한다.



이를테면 나의 외할머니는 전통시장을 방문하실 때면 지인을 여러 명 만나곤 했다. 최신 통신 수단에 밝지 않으신 분이기에 사전에 연락하고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전통시장에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네 주민과 동향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다. 이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던 소셜 네트워킹의 옛 메커니즘이 전통시장에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기에 나타나는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도시 정책을 고안하는 행정 부처나 유관 기관, 스타트업에서 지역 공동체의 구심점 기능을 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모색하고 있는 추세는 자못 흥미롭다. 시대 흐름에 알맞은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 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SNS가 인적 네트워크과 커뮤니티의 본질적인 기능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한다는 한계 인식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공동체, 커뮤니티는 거주지, 생활 권역을 중심으로 구성원의 일상과 함께 숨 쉬며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런 조직은 구성원 모두의 희로애락을 어루만져왔으며, 특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유명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쌍문동 여사들이 매일 같이 오후 시간을 보내던 골목길 평상, 아파트란 폐쇄적인 주거 형태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층과 아래층을 이웃을 연결해주었던 반상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비록 관심사 또는 취미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모임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성장해가는 추세이지만, 주거지나 생활 권역에 기반하지 않는 커뮤니티의 경우 사회 구성원의 일상적인 면면을 포괄하는 커뮤니티의 기능을 온전히 해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 관점에서 지역 주민 누구나 장을 보기 위해서, 혹은 마실 삼아 들러 이야기를 나누는 아랫장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얼굴을 비추고 서로 안부를 묻고 물건을 사고팔며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대화. 이는 1인 가구 증가, 별다른 교류 공간 없이 층과 벽으로 나뉜 분절적인 주택 건축이 보편화된 현시대를 고려할 때 커뮤니티의 소통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법, 혹은 특정 공간을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을 읽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시대의 상업 공간으로 간주되어왔던 전통시장은 사실 '필요에 의해 결집하고 대면적인 소통을 통해 친밀감을 쌓으며 각자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커뮤니티의 본질을 웅변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온라인 기술이 더욱 고도화되는 미래에도 이는 대체할 수 없는 전통시장만의 미덕이며, 온라인 시대에도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자명한 주장을 증명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고민하고 있다면, 대형마트나 거대 유통망의 강점을 쫓기보다는 이렇듯 시장만의 대체 불가능한 미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한, 추운 날씨에도 호객과 흥정이 끊이지 않는 생생한 현장감 역시도 이커머스가 대체할 수 없는 전통시장만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얼굴을 맞대고 이뤄지는 대면적인 거래가 가장 일반적인 상거래 방식이었던 반면, 기술 발달로 인한 과도기에는 화면 속 쇼호스트를 매개로 삼고 TV와 전화를 이용하여 상품을 구매하는 전통적인 홈쇼핑이 이뤄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커머스, 소셜커머스가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요즘에는 온라인으로 정보를 훑은 뒤 오프라인 매장에서 상품을 피팅하거나 상세히 살펴보고, 다시 온라인 최저가를 검색하여 구매하는 소비 형태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제철 식품에 대한 이야기, 식품 신선도 감별법, 타 점포에 대한 구전적인 평가 등은 여전히 아랫장과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활발하게 오간다. 특히 신선도가 생명인 수산물과 같은 식품의 경우 단골로 드나드는 점포가 있다는 건, 속이 쓰릴 때 예의 흡족한 맛을 내주는 단골 국밥집의 존재만큼이나 든든한 무엇이다. 게다가 상인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감상하며 못 이긴 척 구매를 결정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는 생산자, 유통 상인, 소비자 사이 유대감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과도기 홈쇼핑이 쇼호스트의 화려한 언변과 모델의 멋진 퍼포먼스를 전면으로 내세운 건, 아직 현장감 있는 퍼포먼스에 익숙했던 당대 사람들을 겨냥한 연출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 불가능 한 현장감. 이 역시도 이커머스의 확장 속에서 전통적인 오프라인 상업 공간이 비교 우위로 드러낼 수 있는 강점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오직 두 눈만 겉으로 드러낸 상인들은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젊은이가 무언가를 구매할 손님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으리라. 그렇다. 나는 아침 허기를 달랠 순대국밥이란 목적에 충실한 21세기 소비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장의 사소한 비유조차 출생 연월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중후한 감성의 소유자인 나는 왁자지껄한 시장에서 다시 한번 컴퓨터와 책상 밖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건과 삶을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어 보았다.


처음에는 추위를 극복하는 삶의 향기에 가슴 뭉클해하다가, 뒤돌아서 시장 활성화의 맹점을 곱씹는 모순적인 에디터. 그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모습을 뒤로하고 조용한 어느 주택가를 방문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어르신들께서 모두 탑승하길 기다린 뒤 손잡이를 잡고 바라본 창밖으로는 순천의 시간이 별다른 움직임 없이도 잘만 흐르고 있었다.



Coming Up


순천 - 행동/금곡동/영동, 문화의거리(동네인포집, 그냥과보통), 바구니호스텔

통영 - 서호시장, 봄날의책방, 잊음(서피랑), 강구안(커피로스터스 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극한(極限) 마감 후 극한(極寒) 휴가 - 순천|통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