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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호 May 18. 2018

인간적인 동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순천시 향동

1802 순천-통영 여행 #2

사실 계획하고 있던 목적지는 책방, 공방, 예술 공간이 많다는 '순천 문화의거리'였다. 분명 업무와는 무관한 휴가였지만, 관련업 종사자의 입장에서 지역성을 담은 면모가 있을지, 혹은 일을 하면서 놓쳐왔던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지 사뭇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더랬다.


지인으로부터 산책하기 좋다고 추천을 받은 매산고 인근 기독교문화거리를 둘러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이 조금 빠듯하여 문화의거리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 산에서 찬바람이 불어왔으나 한적한 마을 어귀는 정오의 햇살을 받아 평온한 모습이었다. 튀는 건물 하나 없이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형성된 마을. 그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이며 필지가 넉넉하게 구획되어 있어 어디에 눈을 두어도 답답하지 않다. 모두가 일터로 떠난 시간,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어 골목은 정오의 햇살을 한가득 받고 있어 행인의 마음을 환히 밝힌다. 마당이나 담벼락에서 자라나는 나무나 식물에 눈길을 주며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고, 서로 다른 질감의 건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다가 차 두 대 정도가 간신히 오갈 수 있는 골목길은 신도시의 넓은 대로와는 달리 보행자의 행동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는 동네의 외적 구성 요소가 주민 또는 방문객의 입장에서 풍경과 정취를 받아들이기에 부담이 없도록 잘 다듬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조금 어려운 말을 동원해보자면 순천시 향동 일대는 보편적인 휴먼 스케일(인간적 척도, 인체공학적)에 부합하는 동네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대표적인 동네로는 서울 연희동, 경기도 수원 행궁동 등이 있다.



그렇다면 한 동네는 어떻게 휴먼스케일에 맞춰 다듬어질까? 이 과정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어떤 동네는 국가 중요시설과 가까이 있어 제도적으로 신축할 수 있는 건물 높이에 제한을 받는다. 그와 다른 곳에 있는 어떤 동네는 도심에 가깝지만, 상대적으로 교통 접근성이 떨어져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면서도 전원적인 생활을 원하고, 자가 차량을 통한 이동이 자유로운 부유층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향동은 순천시 원도심으로 과거 순천부 읍성에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순천향교 주변으로 형성된 전통적인 부촌이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신도심 개발과 함께 공동화가 발생하여 침체기를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순천시에서는 2014년 이래로 단계적 도시재생을 진행해왔으며 오랜 동네 곳곳에 은은하게 덧칠된 세련미는 바로 도시재생 사업의 결과물이다.


여기에 더해 순천시에서는 오랜 주택의 리모델링을 공공 차원에서도 지원하여 주택가의 미관을 다듬어왔다.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고 있지만, 전국 각 시군에서는 도시의 경관과 공간 디자인을 고려한 조례, 지침 등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마을, 동네의 휴먼 스케일을 구성하는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외관은 이런 관점에서 정부, 지자체 주도로 다듬어지기도 한다.



반면 뜻있는 개인, 단체가 마을의 인간적인 척도를 다듬어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외형적인 관점에서는 지역을 기반으로 공간적인 특수성을 고려하여 건축물을 설계하거나 시공하는 이들이 마을의 미관을 새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길 바란다.



물론 외관을 다듬는 과정에서 밑바탕이 되는 건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주거 지역의 필지, 그리고 건축법과 같은 물리적-제도적 제약이지만, 앞서 언급한 이들은 그런 틀 안에서 건축적인 고민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끌어낸다.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 이후로 용적률, 공간 효율, 경제성 등에 초점을 맞춰 좌우되어온 마을 건축의 패러다임이 개성과 맥락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는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 공간 운영, 사업, 마을 활동 등 소프트웨어적인 요소를 더하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활동이 더해지며 동네는 사람 냄새를 더해간다. 마을에 거주하거나 머무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거나 손님을 상대로 영업하는 사람들의 자유의지가 반영된 결과, 동네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구성원의 가능성을 임의로 배합하여 만들어 낸 고유한 개성을 입는다.



사족이 길었지만 향동을 정처 없이 걸으며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위가 물러갈 즈음 담벼락 위로 알아서 피어나는 꽃처럼, 인간적인 동네란 경제적인 수치,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마을 구성원의 자유 의지에 따라 다듬어지는 동네다. 물론 국가, 지자체, 커뮤니티 등 사회 전체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마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는 본질적으로 이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경제적인 논리보다는 마을 주민의 편안함과 불편함을 먼저 고려하는, 그리고 정치적인 역학 관계가 아닌 마을 구성원의 심리적 교감과 신뢰에 기반을 두는 인간적인 마을을 동경하고 또 꿈꾼다.


겉보기에는 한적한 주택가에 불과한 마을이지만 순천시 향동은 자세히 걸어볼수록 정중동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동네다. 전국 모든 신도시에 표준 규격으로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는 시대, 도시 개발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본질을 되짚어 볼 시기가 아닐까? 적어도 누구의 마음속에나 이토록 정이 가는 '우리 동네'가 하나쯤은 임할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해보며 문화의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Coming UP


순천 - 문화의거리(동네인포집, 그냥과보통), 바구니호스텔

통영 - 서호시장, 봄날의책방, 잊음(서피랑), 강구안(커피로스터스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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