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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호 Aug 07. 2018

노량진 풍경

세상만사 요지경 이곳에 모여


선로 위로 기차가 우르르 지나가자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는 미세하게나마 파르르 울린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63빌딩의 유리창은 정오의 태양 빛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중국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간 육교 위로는 몇몇 노점상이 자리 잡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없는지 행인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가지런히 놓인 골동품 사이로 유독 번쩍이는 금빛 탁상시계가 눈에 띈다.


구 노량진수산시장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역 염천교 인근에서 운영됐던 수산시장은 1971년, 노량진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그 이후로 이곳은 오랜 기간 수산시장의 대명사와도 같은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새로이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한 수협중앙회의 현대화사업을 놓고 구상가 상인들과 신상가 입주 상인, 그리고 수협의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일련의 갈등 속에는 구 시장 건물이 안전등급 C등급으로 충분히 보수가 가능하다는 주장, 새롭게 지어진 상가의 호당 면적이 구 시장보다 협소하다는 문제 제기, 오랜 기간 지적받아온 위생 문제 개선 필요성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렌즈로 담아낸 기존 시장의 불빛은 매혹적이지만, 락카로 휘갈겨 쓴 철거 문구가 스산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철거 및 신 노량진수산시장 입주를 두고 첨예한 갈등이 빚어졌다


분명 오랫동안 비판받아왔던 일부 점포의 위생문제, 바가지 가격, 불친절은 오랜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구 시장 상인들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이며, 상인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영업을 위한 편의성이 실종된 상가 건물을 설계한 수협의 대안 역시 절실하다. 하나의 선로 위에서 마주 본 채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관차를 연상케 하는 구 상가와 신 상가의 위태로운 모습.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포용과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 옛날 노들나루는 사람도 나르고 짐도 날랐죠


본래 노량진은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노들나루’라 불렸다. 노들나루는 다리가 없던 한강 남북을 잇는 중요한 나루터였고, 한강 지류를 통해 한양으로 도착하는 모든 조운이 노들나루에 집합하였을 정도로 그 시대 서울을 대표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도 한강철교를 건넌 경부선 철도는 노량진을 제일 먼저 거쳐 가지만, 2005년 이후로 전철만이 이 역에 머무를 뿐 열차는 무심히 노량진을 스쳐 지난다.


오늘날 노량진은 공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노량진 주민과 고시생들의 애환을 묵묵히 함께해온 노량진역 육교는 35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2015년 9월을 기점으로 철거되었다. 그러나 노량진로 주위를 에워싼 공무원시험 학원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때 노량진뉴타운 개발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노량진 고시촌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요즘, 안정적인 직장의 꿈을 안고 노량진 고시촌으로 향하는 청춘의 숫자는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한때 낙후된 시설의 재개발을 외치던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대로와 골목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 붐빈다.


고시원 뒷골목, 컵밥 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는 건 노량진의 오늘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컵밥 거리 안쪽 좁은 골목으로 공시생들이 바삐 오간다. 홀로, 둘이, 혹은 네 명 정도가 편한 복장으로 복잡한 골목을 훤히 꿰고 있다는 듯 움직인다. 좁디좁은 분식집 안에서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며 끼니를 해결하는 여학생 두 명, 컵밥 거리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젊은 학생들의 행렬은 모두 인상적이다.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고시원/원룸 빌딩 앞 골목에 지그재그 서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의 노량진 고시촌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말없이, 멍하게 스마트폰과 건물 외벽을 번갈아 바라보는 흡연자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허나 그들을 애잔하게 여기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모습을 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 2017년 3월, 아는동네 포스트를 통해 배포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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