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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씨 Apr 04. 2020

좋아했던 그 사람이 최면을 걸었다

대학 시절 좋아했던 선배 H가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졸업한지도 꽤 됐는데 이제서야 곱씹어보니 그렇다. 그렇다고 이상한 최면술사 이야기는 아니다.






신입생 오티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H 선배는 뭔가 튀는 사람이었다.

잘 생긴건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호일펌을 하고 구제옷을 입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관심이 갔던게 나 혼자였나보다. 

동기들은 깔끔한 인상의 J선배에게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술도 취했겠다 새파란 신입생이라 겁도 없겠다 나는 그 선배 옆으로 돌진했다.

자세히 기억 안나지만 온갖 아양을 부린 끝에 꽤 친해지게 됐고 입학하자마자 CC인가?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던 그 때,  H 선배는 말했다. 이틀 뒤에 군대 간다고.






잠깐 배신감이 들었지만 정말 어리고 철이 없던 나는 논산 입소식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런 말이 없었지만 '썸타는' 사이가 되어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편지가 오갔었는데 이상하게 다른건 다 기억에 안남고 이 구절만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다른 과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끝에 덧붙인 말이다.





나 빼고 노는거 진짜 싫어하는데






그때는 생각없이 읽고 지나갔는데 나도 모르게 이 말에 최면이 걸렸나보다.

원래 있는듯 없는듯 존재감 없이 지냈던 나는 그 순간부터 미친듯이 '나 빼고 노는 꼴'을 보지 못했다.




초인적인 오지랖을 발휘해 과대도 하고, 신생 동아리에도 들어가 팀을 꾸리고,

술자리에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이 버릇이 이어져서 두 아이의 엄마인 지금도 어디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소속되면 일단 열심히 오지랖을 부리는 편이다. 회사라는 소속이 없어지자 스터디라는 조직을 만들고, 블로그를 하면서 또 각종 모임에 속하고, 요즘 뭐 배우려면 필수인 각종 단톡방에 입장해 있고...




사실 이제서야 '나 빼고 노는 꼴 못보는 병'을 자각하고 있고, 각종 피로가 몰려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잠수타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고, 다들 별일 없이 잘 살텐데 말이다.




지금 내가 제일 필요한 것은 아마도 진짜 나를 따로 빼놓고 들여다보는 자아찾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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