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로 변신하는 당신만의 토템이 있나요?
나는 사실 첫 사회 생활을 작가로 시작했다. 방송 작가였다. 근데 작가긴 한데 뭔가 진짜 작가는 아닌 느낌이었다. 주업무는 출연할 사람들이나 장소를 섭외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글을 안쓴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구성을 잡는건 피디나 메인작가의 몫이었고, 나는 프리뷰라고 해서 영상에 나온 말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어내는 노가다를 하거나 자막 정도를 정리했다. 연차가 좀 차고 난 뒤에는 나도 대본을 드디어 쓰게 되었지만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은 드물었다. 시청자가 알아야 할 정보나 영상의 흐름상 이해시켜야 할 나레이션을 써야했는데 그것도 물론 글이었지만 내 생각이 들어가긴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방송 작가일을 하고 있지 않고, 평범한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하지만 글에 대한 욕망이 쉽게 꺼지진 않는건지 블로그로 끄적끄적 내 생각과 관심사에 대해 글을 적기 시작했고 경력을 살려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라는 말보다는 블로거, 팟캐스트 진행자라는 말을 더 익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실용서 책을 낸 출판사에 나도 한번?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팟캐스트 하는 방법을 다룬 전자책을 투고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 출판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실용서가 아닌 자기계발서 내용으로 책을 내보자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수락을 하고 나서 계약서에 싸인까지 하고 나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고의 늪'.
방송 대본도 그렇고, 블로그도 그렇고 짧은 호흡 위주로 글을 써온 나로써 상대적으로 긴 호흡으로 글을 쓰는 것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던 나는 요리조리 미루고 미루다 마침내 데드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책 못 낸다!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을 켜고 자리에 앉아도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런것 같다며 미드를 보고 유튜브를 보며 글쓰기에 대한 압박을 피해 다녔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이리앨이라는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보았는데. 아! 이건 나를 보라고 올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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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기 힘든 유튜브 특유의 제목을 보고 영상을 보고나서 나는 나만의 '토템'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영상에 나온 미국 최고의 경기력 향상 코치이자 멘탈 게임 전략가인 토드 허먼(Todd Herman)에 따르면 흔히 부캐라고 불리는 대체 자아(alter ego)와 관련해서 토템을 사용하라는 내용이 있다. 토템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부캐가 쓰는 능력에 대해서 좀 더 의도적인 태도로 무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를 말한다고.
이 영상을 보고 상당히 고무된 나는, 즉시 내가 '작가'라는 부캐로 변신하고 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토템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바로 '안경'. 흔히 작가라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릴때 안경은 착 붙는 도구가 아니던가? 사실 나는 라식수술을 해서 시력이 그렇게 나쁘지 않지만, 가끔 민낯을 가려야 할때 쓰는 안경테가 하나 있었다. 깊은 서랍속에 쳐박혀 있던 그 안경테를 주섬주섬 다시 꺼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 이제 난 초고를 겁나 잘 쓰는 작가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다시 노트북을 펼쳐 초고가 쓰인 파일을 열었다. 보기만 해도 숨막히는 10포인트의 촘촘한 바탕체들이 흰 종이 위에 누워있다. 잠깐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앉은 자리에서 프롤로그 꼭지를 한번에 써버리고 말았다.
사실 토템이니 부캐니 다 떠나서 그냥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캐로 변신 시켜주는 토템을 하나 정해놓고 그것을 착용하거나 지니는 것 하나로도 의지력이 솟아 오른다면 의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마치 쫄쫄이 수트를 입으면 평범한 시민에서 슈퍼파워를 지닌 히어로로 변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간에 말한 유튜브 영상이 궁금한 분들은 아래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