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학교 다닐때도 약속된 글쓰기를 싫어했다. 다른 과 아이들이 ppt나 워드로 자료 조사 후루룩해서 과제를 짜깁기 하는동안 우리는 시를 쓰고 소설을 써야 했다.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면서 과제는 안하고 술이나 마시느라 학점은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좋은 시절(?)에 다녀서 그런지 어찌어찌 졸업은 했었다.
졸업후에 쓰는 글들 역시 의무감에 쓰는, 생존형 글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1도 들어가지 않은 광고글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시청자 혹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글을 쓰는건 자료 조사에 가까웠다. 그들이 원하는 키워드를 어느 정도 톤이 맞춰진 말투로 써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글들은 종이가 아닌 영상에서 구현되었다. 그리고 데드라인이 있어서 미룰수도 없었다.
엄마가 된 후 쓰는 글들은 블로그에서 쓰는 짧고 간편한 글이었다.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쓰고 싶은 내용을 썼다. 그렇다고 일기만 쓴 것도 아니고, 나름 정보글도 쓰고 리뷰도 쓰고 다양하게 썼지만 별로 부담은 없었다. 안 쓰면 학점 빵꾸나는 것도 아니고, 데드라인이 있어 죽어도 마감을 지켜야 하는건 아니었다.
이렇게 짧고 가벼운 글만 지향하면서 쓰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책을 내겠다고 계약을 맺고 초고를 쓰고 있다.그냥 이것도 글이니까 아예 안 쓰던 사람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써지겠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게 너무 어이 없을 정도로 멘붕을 겪고 있다. 이건 진짜 너무 힘든 글쓰기다.
우선 호흡이 길다. 전체적인 양도 많은데 유기적으로 앞뒤가 말이 되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 내 책에는 인터뷰 내용도 들어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어쨌거나 내 시선에서 그 내용을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갑자기 비문이 엄청나게 신경쓰인다. 그동안 비문은 신경도 안쓰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영어식 말투도 엄청 쓰고 있다. 외국인 저자의 자기계발 책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사실 무엇보다 엄청난 부담감이 뇌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도 글 쓰던 사람인데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 (사실 아무도 신경 안쓰는 부분), 잘 안팔리면 어떡하지? 초고를 쓰기도 전에 정말 쓸데없는 판매 부수 걱정 등등. 속으로만 앓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몸도 시들시들하고, 의욕이 전체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꾸 딴짓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안하던 청소를 열심히 하고, 평소에 아이들과 잘 놀아주지도 않다가 갑자기 같이 놀아주고 있다. 웹툰과 넷플릭스 새로 볼 거 없나 뒤져보기도 한다.
개굴개굴. 책 쓰라니까 딴짓이나 하고 청개구리가 따로 없는 요즘. 브런치도 개구리짓의 하나인지 막 가볍고 머리에 든 생각을 편하게 끄집어내고 싶어진것 같다. 그래도 좀 부담없이 뇌를 비우고 손가락을 놀려 타자를 치니까 뭔가 예열된 느낌이다. 이제 다시 집중해야겠다.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