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 회고록 시리즈 02
작가를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하는 J.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떠올리는 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아주 즐겁고 행복했으니까. 약 30년전 경기도 어느 도시의 병설유치원. 다른 기억은 아무것도 안 나는데 선생님이 읽어주는 구연동화만 생생하다. 옹기종기 선생님 앞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듣는 그녀와 친구들. 선생님은 앞에는 그림, 뒷면에는 동화가 적혀있던 큰 하드보드지를 들고 열심히 동화를 읽어주셨다. 선생님의 목소리나 그림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건 아니다. 하지만 코흘리개가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던 이유는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일거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림이 곁들여진 이야기라면 차라리 만화 영화가 훨씬 재밌지 않았을까?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녀는 그림 한장에 느릿느릿 진행되는 동화가 너무 좋았다. 평소에 공상하기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과 잘 맞았던 걸 수도.
그 다음 이어지는 기억은 책장에 줄줄이 꽂혀진 세계명작동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았던 커다란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전집 시리즈. 그녀는 한글을 깨우친 이후부터 그 책들을 읽고 또 읽고 줄기차게 읽어댔다. 지금 떠올려 봐도 종이가 오래되서 거의 다 누런 색이었고, 냄새부터 쾨쾨한 것이 확실히 새 책들은 아니었던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녀는 그 책들이 마냥 좋았다. 뛰어 노는것 보다 책을 읽는게 훨씬 좋았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서 명작동화는 만화잡지로 대체됐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카테고리는 '읽는 것'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는 그닥 많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또래보다 아는건 많았고, 글을 쓸 때는 책에 있던 문체를 흉내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그녀의 글은 애늙은이 같았고 허세로 가득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이 먹혀들었는지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곧잘 상도 받아왔고, 이미지도 그렇게 굳어갔다. 말도 별로 없고 조용하게 책 많이 읽는 아이. 글도 제법 쓰는 아이. 하지만 그녀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 '글 잘 쓰는 이미지'가 훗날 발목을 잡을 줄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