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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Nov 06. 2021

4. 손진태의 ⟪조선민담집⟫ 속의 구미호와 여우

구미호가 등장하는 구전설화는 1920년대에 구전 현장에서 여러 편 채록되었다. 정인섭과 손진태의 구전설화집에서 구미호가 등장하는 설화는, 최인학의 한국민담 유형분류체계에 따르자면, ‘106 소금장수와 이상한 뼈’ 유형과 ‘258 구미호와 여의주’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들이다[1]. 손진태와 정인섭의 설화집에 각각 수록된 ⟨구미호⟩란 제목의 이야기를 제보한 사람은 모두 같은 인물이다. 1928년 1월에 김양하가 ⟨구미호⟩를 구연할 때 손진태와 정인섭이 함께 듣고 각자의 설화집에 따로 수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설화집에 수록된 ⟨구미호⟩의 서사가 동일한 데다 짧아서, 손진태의 ⟪조선민담집⟫(1930)에 수록된 전문을 최인학이 번역한 그대로 옮겨 놓겠다 [2]. 


어떤 사람이 길에서 소변을 보면서 밑을 보니까,소변을 해골 위에 누고 있었다. 장난 삼아 “ 어이 차냐 ?” 하고 물으니 “ 차다.” 라고 대꾸하고 또 “ 따스하냐?” 하고 물으니 따스하다고 대꾸한다. 그래 겁이 나서 도망치니까 해골이 쫓아온다. 점점 더 겁이 나서 어느 술집 앞에 왔을 때 “여기서 기다려 줘! 술을 사가지고 와서 마시게 해 줄 테니.” 그리고는 술집으로 들어가 술집 뒷문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해골은 볼 수 없었다. 수년이 지난 후, 같은 술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까 전의 술집 앞에 같은 술집이 생겼다. 그리고 예쁜 주모가 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면서 “몇 년 전 내가 이 집이 서있는 이 자리에서 이상한 해골을 속여 도망친 일이 있었다.”고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이내 구미호로 변신하여 “옳지 ! 너였구나. 그때의 해골은 바로 나다. 지금까지 너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 사나이를 먹어 치웠다. 해골 위에다 오줌을 누어서는 안 된다. 


이 해학적인 설화 속의 구미호는 집념과 복수심이 강한 무서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달기처럼 요사스럽거나 사악하지는 않다. 자신의 해골에 오줌을 누고 말로 희롱까지 한 남자를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자신을 속인 남자에게 복수하려고 같은 장소에서 오랜 세월 기다린 집념의 여성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20세기 초에 전북에서는 ⟨소금장수와 이상한 뼈⟩라는 이야기로 전승된다 [3]. 이 전북 민담에서는 소금장수가 심심풀이 삼아서 길에 놓인 정강이 뼈를 자신의 정강이에 대어 보았다가 곤욕을 치른다 [4]. 정강이 뼈가 자신을 끈질기게 뒤따라오자 소금장수는 뼈에게 소금 짐을 지키고 있으면 자신이 잔치 집에서 먹을 것을 얻어오겠다고 둘러대고 달아난다. 세월이 흘러서 뼈다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소금장수가 정강이 뼈와 헤어졌던 장소에 가보았더니, 정강이뼈는 ‘늙은 할망구’로 변신해서 복수한다. 


손진태가 채록한 또 다른 구미호 이야기는 ⟨인지(人知)의 한계⟩라는 제목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구미호와 여의주’ 또는 ‘여우구슬’ 유형에 속한다. 이야기의 개요는 간단하다. 서당에 다니는 어떤 소년이 공부하러 가는 도중에 만난 아름다운 처녀의 유혹에 넘어간다. 소년은 몸의 접촉은 허락하면서 입맞춤을 거부하는 처녀가 구미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구미호의 구슬을 빼앗으면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처녀에게 이별하겠다고 협박해서 혀끝에 있는 팔각 야광주를 빼앗는다. 하지만, 소년은, 처녀에게서 달아날 때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땅을 먼저 쳐다보게 되어서 하늘의 일은 모르고 지상의 일만을 알게 되었다. 이 설화의 말미에 손진태가 “구미호에 관한 설화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의 여러 지방에 특히 많다. 그러나 남방에서는 그냥 여우로 불리고 있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5], 우리 옛사람들은 구미호와 여우를 속성이 다른 동물로 인식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손진태와 정인섭이 채록한 구전설화에서 구미호는 자유자재로 변신해서 인간계의 남자를 유혹하지만, 그 남자의 속임수에 쉽사리 넘어가는 어리숙한 일면을 지녔다. 구미호는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남자에게 집요하게 복수하는 괴물이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야광주를 지닌 신이한 존재이기도 하다.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에는, ‘구미호’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여우가 등장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우누이와 삼 형제⟩는 여동생이 식인귀로 변해서 집안을 망하게 하는 ‘여우누이’ 유형의  이야기이고, ⟨중국의 여우 황후⟩는 ⟨무왕벌주서⟩나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달기 유형의 ‘요부-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한 나라를 망치는 ‘요부-구미호’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1980년대에도 철원 지방에서 ⟨궁예와 구미호⟩란 구전설화로  전승된다 [6].  이 설화에서 구미호는 궁예 부인을 잡아먹고는 그 부인의 탈을 쓰고 악행을 저지른다. 궁예는 웃는 법이 없는 부인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웃는 것을 보고는 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무수하게 많은 사람을 불태워 죽인다. 구미호는 사람의 탈을 벗고, 묘지에 버려진 불에 탄 시체를 몰래 먹으면서 지내다가, 어떤 대신이 궁궐에 숨겨서 데려온 삼족구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나서 죽는다. 중국에서 달기나 포사로 변신한 구미호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궁예 부인으로 변신한 듯싶다.  이외에도, 달기 유형의 ‘요부-구미호’가 등장하는 설화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에 수록된 다양한 여우 설화 가운데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강감찬 탄생 설화뿐이다. 강감찬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신성성을 지닌 여우를 제외한다면, 여우들은 대부분 인간을 유혹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요물들이다. ⟪조선민담집⟫에 수록된 여우 설화 가운데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산신과 용왕⟩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여우는 단순한 요물이 아니라 마성을 지닌 여산신으로 등장한다. 손진태는 ⟨여산신과 용왕⟩에 등장하는 여우를 구미호가 아니라 ‘천년 묵은 여우’로  지칭하고 있지만, 경남에서 1970년에 채록된 다른 각편에서는 구미호로 설정되었다. ⟨여산신과 용왕⟩에서는 용왕, 옥황상제, 여산신 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공간적인 배경의 스케일이 매우 크다. 여우가 지닌 성격도 다른 이야기 속의 여우와 비교해보면 입체적이다. 이 설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이어서 쓰기로 한다.  


[1] 최인학. ⟪한국민담의 유형 연구⟫,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4.  이 책은 인하대학교 도서관에서 전자책으로 내려받기할 수 있다.

[2] 최인학 번역, ⟪조선설화집⟫ 민속원 2009.

[3] 임석재전집7, ⟪한국구전설화: 전북 민담 편 1⟫, 평민사 1990, 249-250면.

[4] ⟪임석재전집7 한국구전설화 전라북도 편⟫, 평민사 1999, 249-251면.

[5] 孫晋泰, 朝鮮民譚集,  勉誠出版 2009, 34면.

[6] 유인순 (1988), 鐵原地万 人物傅設 硏究 - 弓牽, 金時習, 林巨正, 金應河, 洪•枷氏, 高진해를 中心으로, 강원문화연구 8, 78-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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