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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Sep 29. 2021

3. 한국고전문헌 속의 사대부의 적, 구미호

앞에서 살펴본 ⟪삼국유사⟫와 ⟨고려세계⟩에는 ‘늙은 여우’ 또는 ‘3천 년 묵은 여우’는 등장하지만, 그러한 늙은 여우를 구미호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산해경⟫ 이나 ⟪오월춘추⟫에 등장하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를 일컫는 ‘구미호’란 용어가 언제부터 우리 고전 문헌에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를 활용해서 구미호와 여우에 관한 시와 산문을 검색해보면, 우리 옛 선비들이 구미호와 여우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지녔는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동국이상국집⟫에 수록한 노무편(老巫篇)(이진영 역 1980)을 살펴보면, 음란한 노래와 괴상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늙은 무당을 구미호에 비유한 사실을 알 수 있다.[1]  “우리 해동에도 아직 이 풍속이 남아있어 / 여인은 무당 되고 남자는 박수가 되네 / 그들은 자칭 신이 내린 몸이라 하지만 / 내가 들을 땐 우습고도 서글플 뿐이다 / 굴속에 든 천년 묵은 쥐가 아니라면 / 틀림없이 숲속의 아홉 꼬리 여우일레."


구미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조선 시대에는 더욱 심화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의 상촌집에 수록된 유호행(有狐行)에 등장하는 여우나 김육(金堉: 1580~1658)이 잠곡유고(潛谷遺稿)에서 언급한 노호(老狐)는 같은 속성을 지닌 요물이다. 이 두 시에서 구미호 또는 여우는 아름답고 교태가 넘치는 여자로 변신해서 남자를 유혹해서 정기를 상하게 한다. 김육은 늙은 여우 老狐(정선용 역 1998)의 끝머리에서 강한 활을 구해서 백 개의 화살로 여우 무리를 모두 쏘아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구미호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현한다.  


우리 집의 남쪽 산 그 산 북쪽 골짜기에 / 我家家南山北谷

어둠침침 큰 나무가 삼단처럼 우거졌고 / 陰陰大木森如束

덩굴나무 서로 엉켜 한낮에도 어두운데 / 藤蘿盤結晝而晦

그 안에 여우 있어 바위 아래 산다 하네 / 中有狐來巖下伏

옛 노인들 말 전하길 자호의 정(精)이 / 故老相傳紫紫精

제맘대로 모습 변해 유혹하며 꾀인다네 / 能作變幻爲

가끔가단 인가 향해 손에 불을 들고 있고 / 或向人家手持火

어쩌다간 해골 이고 북두성에 절을 하며 / 或拜北斗頭戴

어둠 틈타 산 나와선 갖은 요태 다 부려서 / 乘昏出山逞妖態

온갖 교태 살랑살랑 사람 눈을 혹한다네 / 百媚生春眩人目

연지와 분 화장하고 보석들로 꾸몄으며 / 脂粉輕勻珠翠飾

맑은 눈에 새하얀 이 얼굴 옥과 같은데 / 明眸皓齒顔如玉

생긋 웃어 때때로 보조개를 지으며 / 然時見輔

토라졌단 홀연히 수심 가득 지으면서 / 爾忽作愁眉蹙

달콤한 말 속삭이며 교묘하게 현혹하니 / 甘言又能巧如簧

어둠 속에 참과 거짓 그 누가 밝게 알리 / 暗中眞僞誰得燭

예로부터 젊은이들 꾐에 많이 빠졌으니 / 由來年少多所迷

그 누가 심장이 목석과도 같겠는가 / 孰有心腸如石木

금옥으로 전두를 만들어 가지고는 / 輕將金玉作纏頭

밤마다 성 밖에서 앞다투어 뒤쫓는데 / 夜夜城邊競追逐

혼 빠지고 정기 상해 죽을 지경 되어서도 / 迷魂喪精幾欲死

막적이 짐독임을 깨닫지 못한다네 / 不悟莫赤爲

여우가 꾀인다는 설 서책에 실려 있어 / 狐媚之說載往史

괴이한 일 전부터 때때로 있어 왔네 / 怪事從前有時或

내 듣건대 천년 여우 화해 음부 된다는데 / 吾聞千載之狐化淫婦

이 요물이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았는가 / 此物如何死不速

또 듣건대 구미호가 청구에 있다는데 / 又聞九尾之狐在靑丘

이 요물이 어찌하여 집 가까이 사는가 / 此物如何近我屋

원하건대 강한 활에 일백 개의 화살 구해 / 願得强弓勁弩金矢百

여우 무리 쏘아 죽여 한꺼번에 쓸고 싶네 / 射盡狐群一時戮


이 시에서  김육은 구미호가 해골을 머리에 이고 북두성에 절한 후에 교태가 넘치는 예쁜 여자로 변신해서 남자들을 유혹한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변신은 신흠의 유호행에서도 똑같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황현 매천이 1895년에 지은 노호행 老狐行에서도, 천년 묵은 여우는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해서 교태를 부리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사악한 동물로 그려진다. 임정기는 주해에서 ‘노호행’은 “늙은 여우를 두고 노래한다는 뜻인데, 이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자에게 빌붙거나 혹은 왜적(倭賊)의 앞잡이가 되어서 온갖 간악을 자행하는 자를 늙은 여우에 빗대서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한다[2]. 김육과 신흠의 시에 등장하는 ‘해골을 사용한 여우 변신’ 모티프는 구전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전설화에서 구미호 또는 여우는 인간으로 변신할 때 보통 해골 바가지(박적)를 머리에 덮어쓰고 변신한다.


김육은 구미호가 맑은 눈에 하얀 얼굴을 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여우 또는 구미호의 모습은  천예록, 전우치전, 서화담전 등의 고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고소설에서 구미호(여우)는 선비를 유혹하려고 들지만, 상대방이나 그 스승이 정체를 꿰뚫어 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임방이 1717년에서 1724년 사이에 편찬한 천예록(정환국 역, 성균대학교출판부 2005)에 수록된 등에 붙들었던 여우를 놓치고 아쉬워하다란 이야기를 보면, 여우가 여자로 변신해서 이회(李繪)라는 정승 자제를 유혹하려 한다. 이회가 어느 날 밤에 홀로 책을 읽고 있는데 자태가 아름다운 여자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미소를 짓는다. 이회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고, 손과 등을 어루만졌더니, 소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좋아했다. 이회는 소녀가 마귀 아니면 여우일 거라고 생각해서 몸을 잡아채 등에다 걸치고 꼼짝 못하게 붙들었다. 하지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데다, 여우가 목덜미를 사정없이 깨물어서 어쩔 수 없이 놓쳤다.


한국 고전 서사문학 가운데 구미호가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작품은 전우치전 이본 중의 하나인 전운치전 경판 37장본일 듯싶다. 1847년에 제작된 전운치전의 도입부에 구미호는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 구미호는 소복을 입은 열대여섯 살쯤 된 아름다운 소녀로 변신해서, 전운치(田雲治)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윤공에게 글을 배우러 서당에 갈 때 산속 대나무 숲에서 유혹한다. 전운치의 일탈을 알아차린 윤공은 여인의 입속에 있는 구슬을 빼앗아 오라고 명령한다. 전운치는 대나무 숲에서 여인을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눌 때 여인의 입속에 있는 구슬을 빼앗으려 하다가 삼켜버린다. 그 구슬은 호정(狐精)이어서 전운치는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게 되고, 지살 일흔 두 가지의 변화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과거에 장원한 후에 전운치는 세금사라는 절에서 머물 때 두 번째 구미호를 만난다. 두 번째 구미호는 열일곱쯤 되는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으로 둔갑한 후 남편과 가족을 모두 도적에게 잃었다는 사연을 지어내서 전운치를 유혹한다. 전운치는 그 여인이 구미호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백 년 동고동락하겠다고 유혹해서 술을 마시게 한다. 술에 취한 구미호를 부용승(芙蓉繩)이란 줄로 묶은 후 구미호의 정수리를 송곳으로 찌르면서 호정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자, 구미호는 호정이 배 속에 있어서 줄 수 없다고 하면서 전운치를 여우골로 데려가 천서(天書)를 세 권 준다. 천서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전운치는 구미호에게 책 내용을 배워서 귀신도 가늠할 수 없는 술법을 알게 된다. 전운치가 배움의 은혜를 입었다고 구미호를 풀어주니깐 구미호가 하늘로 올라가는 척하면서 윤공과 유모로 변신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부적이 붙지 않은 천서 두 권을 도로 찾아간다.


이외에도, 개화기 때 필사되었다가 1910년대 이후에 활자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화담전⟫에서는 구전설화에 나타나는 ‘여우구슬’ 모티프가 서화담과 그 제자 허운의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 서화담은 허운이 반한 “빼어난 미인”의 정체와 구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3] “그 여자는 여우인데, 변화를 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니라. 여우가 수백 년을 묵으면 아름다운 여자를 호려 죽여서 그 피를 빨아먹고, 그 여자의 해골을 뒤집어쓰고 다니면서 어여쁜 남자를 홀린 후 관계하여 양기를 받음으로써 영영 사람이 되려 하는 것이다. 옛날에 있었다는 일을 네가 모르느냐? 그 구슬은 여우의 정기인 호정(狐精)이니라.” ‘여우구슬’ 모티프가 ⟪전운치전⟫과 ⟪서화담전⟫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것을 볼 때, 고소설이 구전설화에서 모티프를 많이 끌어온 듯싶다.


창작 시기가 19세기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기설 奇說⟫이란 한문 단편소설집에 실린 ⟨태백산호암기⟩ (太白山狐菴記)에도 구미호가 등장한다.[4] 이 단편 소설은 구전설화에서 많은 모티프를 끌어온 작품으로서, 비록 서사는 탄탄하지 않지만, 창작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여러 모티프를 지니고 있다. ⟨태백산호암기⟩는 안동에 사는 김생이라는 사족(士族)이 태백산 용문사 근처의 암자에 사는 구미호를 퇴치하는 이야기이다. 김생은 용문사로 공부하러 가다가 중에게 변고를 당한, 어느 양가집 여인을 구해준다. 그 여인은 김생 덕분에 목숨을 가까스로 건졌지만, 모욕감을 이기지 못해서 못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절에 와서 몇 달을 공부하던 김생은 구름과 안개로 둘러싸인 암자에 사는 천하절색의 미인이 구미호일 거로 생각해서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구미호의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김생은 사흘 동안 싸워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절로 돌아오던 김생은 과거에 자신이 구해준 적이 있는 자살한 여인을 만난다. 귀신이 된 여인은 정절을 지킨 덕분에 동해 용왕의 며느리가 되어서 은인인 김생을 도우려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귀신은 시아버지인 동해 용왕의 힘을 빌려서 구미호를 퇴치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큰 언니의 시아버지인 서해 용왕의 힘을 빌려서 구미호를 죽인다. 저승 세계에 간 구미호는 암자에 가만히 머물러 있다가 갑자기 김생과 용왕국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것이 억울해서, 염라대왕에게 하소연한다.


저는 깊은 산에 은거하며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미친 김생이란 자가 공연히 침범하여 곤란하게 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서해 수부에게 청하여 신병을 몰고 와 정벌하기를 극심하게 하여 목숨도 잃었고 집도 부서졌으니, 일이 너무 억울합니다.”


⟨태백산호암기⟩에서 작가는 구미호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어서, 독자는 김생과 두 용왕이 선량한 구미호를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군다나 공정해야 할 염라대왕조차 고소인인 구미호의 편을 들기는커녕 저승의 감옥에 가두고, 김생의 공로를 인정해서 수명을 12년 늘려준다. 작가는 소설 속의 사건이 지나치게 초자연적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끝머리에 모든 사건을 김생의 꿈으로 처리한다.  ⟨태백산호암기⟩가 내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꼬리가 아홉이고 몸이 큰 소와 같은 구미호’에게 신성성과 상서로움을 지닌 고대 구미호의 모습, 인간도 용왕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여산신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이다.  이 소설에서 구미호가 머무는 암자에 대한 묘사도 매우 특이하다.


암자는 아주 맑고 깨끗하였으며 사방 벽에 책, 그림, 글씨가 가득하였다. 시체(詩體)는 소식(蘇軾)의 사시사(四時詞)를 본받 은 듯 했고, 그림은 왕개(王介)의 그림이었고, 자획은 조맹부 (趙孟頫)를 스승으로 삼은 듯했다. 암자의 단청은 지극히 화려 하고 깨끗했다. 문을 열고 바로 들어가서 마루에 오르니, 붉은 치마와 푸른 저고리를 입은 미인이 방 한 가운데에 앉아있었는 데 인품과 얼굴, 자태가 참으로 절색이었다.


구미호가 머무는 암자는 구름과 안개가 사방을 둘러싼 곳으로서 책과 그림과 글씨가 가득하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기보다는 지식과 교양과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신선이라는 느낌을 준다. 지난 천여 년의 세월을 사대부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받으면서 살아온 여성 신선 또는 산신인 구미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이러한 여산신-구미호의 모습을 1920년대에 구전 현장에서 채록한 설화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제5장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1] 신흠의 ⟨유호행⟩과 김육의 ⟨늙은 여우⟩는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에 올려져 있음.

[2]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에 올려져 있음.  ⟪매천집⟫, 한국고전번역원, 2010.

[3] ⟪한국고전문학전집 25: 홍길동전/전우치전/서화담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431면.

[4] 정병호, ⟨「태백산호암기(太白山狐菴記)」국역(國譯) 및 원문(原文)⟩, ⟪국학연구논총⟫ 제 10집, 2012, 299-310면. 이 단편소설은 ⟨태민국학연구원⟩ 누리집에서 번역본을 손쉽게 PDF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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