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가 일본어로 출간한 ⟪조선민담집⟫(1930)에 수록된 ⟨여산신과 용왕⟩(女山神と龍王)은 산신의 지위를 차지한 ‘천년 묵은 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정인섭은 유사한 여우 이야기를 영어판 한국설화집(Folktales from Korea, 1952)에 수록하였다. 두 학자의 각편은 경남 김해에서 각각 1919년과 1927년에 채록된 이야기이다. 이 두 편과 서사가 비슷한 <거북의 보은>이라는 설화를 임동권도 ⟪한국의 민담⟫(서문당 1996)에 수록하였다. 이 세 편의 설화는 등장인물과 모티프 구성이 매우 유사해서 이야기판에서 구연한 이야기를 그대로 채록한 것 같지는 않다. 가장 일찍 출간된 손진태 본을 토대로 정인섭과 임동권이 이야기를 손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유형을 깊이 있게 연구한 구비문학자들의 논문을 찾을 수 없어서 설화의 전승 양상을 제대로 추적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한국 민담의 유형 연구⟫에서 최인학은 이 유형의 설화를 ⟨288 산신과 용왕과 천신⟩이라고 분류하였다. 이 유형은 선과 악을 대표하는 듯한 두 여산신, 용왕, 옥황상제, 하늘과 바다와 지상의 무사들이 등장한다. 한국 설화에서는 서구의 마녀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계모를 제외하면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데, 이 설화에 등장하는 ‘천년 묵은 여우-산신’은 마성(魔性)과 카리스마를 지닌 초자연적인 여성 캐럭터여서 무척 흥미롭다. ‘천년 묵은 여우-산신’이 등장하는 세 편 가운데 손진태 본이 가장 일찍 출간된 데다 서사가 짜임새가 있어서,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기로 한다.[1]
옛날에 어느 곳에 한 한량(무사)이 살았다. 어느 날 무사는 해변을 걷다가 일곱 명의 소년이 꼬리가 셋인 커다란 거북을 잡아서 일곱 조각으로 나누려는 것을 보았다. 무사는 거북이가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자 소년들에게서 사서 바다에 풀어 놓아주었다. 거북은 무사에게 자신은 용왕인데 인간 세계를 구경하러 왔다가 소년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는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무사는 그 길로 방랑을 계속하다가, 어느 저녁 외딴 산속에 있는 집에 이르렀다. 그 집에 사는 노파는 무사에게 저녁밥을 주고 나서 어디를 갈 생각인지 물었다. 무사가 산에 더 높이 오르려고 한다고 말하니깐 노파는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 노파는 자신이 원래 그 산의 신령이었는데,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인 악녀에게 지위를 빼앗겼다고 말했다. 그 산에 들어간 사람은 자주 있으나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악녀가 그를 해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무사가 그딴 것을 두려워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다음 날 아침 그는 나쁜 여산신을 찾아서 떠났다. 무사는 산속에 있는 어떤 집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자신의 침실로 무사를 데려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결혼하자고 요구했다. “산속에 여자 혼자 살기 쓸쓸해요. 부디 나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요. 나는 이 산의 신령이니까요.” 무사가 무례하다고 말하면서 단호하게 유혹을 뿌리치자, 여인이 한 장의 종이를 꺼내서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천지가 어두워지면서 수많은 불칼이 무섭게 비쳐서 무사는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느꼈다. 무사는 용왕과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여인에게 7일간의 유예 기간을 달라고 말했다. 여인은 비웃으면서, 그가 어디로 달아나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부탁을 들어줬다.
무사가 해변에 당도해서 용왕을 부르자 동자가 나타나서 용궁으로 안내했다. 용왕은 자신의 세 동생과 함께 여산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산신은 큰 소리로 비웃으면서 말했다. “용왕에게 도움을 청했구나. 하지만 용왕의 힘으로 나를 죽일 수는 없어. 내 실력을 보여주마.” 여산신이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깐 세 개의 불 칼이 공중에서 번쩍이면서 세 마리의 용을 각각 둘로 동강 냈다.
여산신의 위협을 받은 무사는 다시 한번 한 달간의 유예 기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여산신의 허락을 받은 무사는 다시 용왕을 찾아갔다. 용왕은 용왕국의 힘만으로는 여인을 물리칠 수 없으니 옥황상제에게 상소해서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천신은 세 명의 무사를 시켜서 산신을 치라고 말했다. 천상에서 온 세 명의 무사는 강한 바람과 세찬 비를 몰고 와서 천지가 흔들릴 정도로 번개를 내리쳤다. 여신은 크게 웃으면서 “이번에는 천신에게 도움을 청했구나. 이번 상대는 강하지만, 내 실력을 보여주마.” 여신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 써서 공중으로 날렸지만, 천상에서 온 세 무사를 이기지 못해서 벼락이 여신의 집에 떨어졌다. 죽은 여신의 모습을 보니깐 한 마리의 큰 여우였다. 무사는 천상에서 온 세 명의 무사에게 예를 갖추어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거에 산신이었던 노파의 집에 들렀다. 무사는 노파를 산신으로 복귀하게 하고, 용궁에 가서 용왕에게도 예를 갖췄다.
이 설화에서 산신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서 그 지위를 차지한 ‘천년 묵은 여우’는 인간계의 무사도 용왕국의 무사도 이길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과 비범한 술책을 지닌 존재이다. 마성을 지닌 여산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천상계에서 온 무사들뿐이다. 지금까지 읽어본 한중일 설화집에서 이 설화에 등장하는 ‘천년 묵은 여우’처럼 땅과 바다의 신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여성 괴물을 만난 적이 없다. 산속에서 외롭게 홀로 산 여산신은 변신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전투에서는 자신감이 넘치며, 적대자에게 기회를 주기도 하는 통이 큰 여걸이다.
이러한 ‘천년 묵은 여우-여산신’ 이야기와 유사한 구미호 이야기가 경남 거제 동부면에서 1970년과 1979년에 구전 현장에서 채록된 적이 있다. 거제 동부면에서 채록된 설화는 제목이 <금강산의 구미호>(임석재전집 10)와 <구여시를 물리친 사람>(대계 8-2)으로 되어 있다. 임석재 선생이 같은 유형의 설화를 1927년에 전북 부안에서, 1933년에 경북 김천에서 채록한 적이 있다. 두 설화의 제목은 <금강산의 괴호>(임석재전집 7)와 <율곡과 금강산 괴호>(임석재전집 12)이다. 이러한 설화들에서 ‘천년 묵은 여우’ ‘구미호’ ‘괴호’(怪狐)는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닌 여우라고 볼 수 있다.[2] 이 네 편의 각편 가운데 1920년대에 채록된 <금강산의 괴호>를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표지 그림은 겸재 정선이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신묘년 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은 두 차례 번역된 바 있다. 김헌선외 2인 번역, ⟪한국의 민화에 대하여⟫, 역락, 2000년: 최인학 번역, ⟪조선설화집⟫ 민속원 2009.
[2] 임석재 선생은 <율곡과 금강산 괴호>를 어린이가 읽기 편하도록 표준어로 다시쓴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시 읽는 임석재 옛이야기 6⟫(한림출판사 2011)에 <금강산 여우와 이율곡>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또한 손진태는 <인지의 한계>에 붙인 각주에서, “구미호에 관한 설화가 함경‧평안‧황해의 여러 지역에 특히 많으며, 남방에서는 단지 여우로 불린다고 말한다. 구미호와 여우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