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각시' 설화의 변이형, 구전 여우각시담
우리 옛사람들이 남긴 고전 문헌에 여우가 현모양처형의 아내로 변신하는 여우각시담이 없는 것처럼,[1] 구전 설화 문학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 지금까지 내가 살펴본 채록 자료들 가운데서, 여우각시담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는 ⟪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세 편이 전부이다.[2] 임석재 선생이 편찬한 ⟪한국구전설화집⟫ 총서를 살펴보아도 여우 각시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의 각종 설화집에는 여우 각시와 인간 남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포송령의 ⟪요재지이⟫, 일본의 ⟪금석물어집⟫과 ⟪일본영이기⟫에서는 여우가 착한 연인 또는 아내로 등장하는 이류교혼담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활발하게 구전된 여우 이야기는 대부분 여우가 식인귀로 설정된 ⟨여우 누이⟩ 유형이거나 사악한 요부로 변신해서 한 가정이나 국가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옛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우는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식인귀, 악녀, 요부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는 듯싶다.
구전 현장에서 채록된, 여우각시가 등장하는 세 편의 이야기도 독립적인 유형이라기보다는 ‘지네각시’ 설화의 변이형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그 세 편 가운데 서사의 짜임새가 가장 탄탄한 각편은 1983년에 대구 시에서 채록한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한국구비문학대계⟫ 7-13)이다. 이 설화는 착한 여우 각시가 등장하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이야기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부모가 부자여서 아들에게 “네 생전에 하루 팔백 냥을 써도 괜찮을 거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팔백이는 하루에 팔백 냥을 늘 썼는데, 부모가 죽어 버리자 살림이 점점 줄어들었다. 돈이 떨어진 팔백이는 죽으려고 강원도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 나무에 목을 매서 죽으려고 하는데, 어떤 여자가 올라오면서 ‘팔백이, 팔백이’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는 팔백이에게 돈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돈을 구해다 줄 수 있으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여자는 팔백이를 기와집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잘 차려 주고 묵을 수도 있게 해 주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여자가 ‘돈을 얼마나 주면 되겠냐’고 물어보니깐, 팔백이는 ‘팔십 냥[팔백 냥]을 줘야 안 되겠냐’라고 대답했다. 팔백이는 매일 여자에게서 팔십 냥을 받았다. 그는 예전에는 돈을 술집에서 모두 써 버렸지만, 이번에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썼다.
팔백이는 한 달간 말미를 얻어서 농사짓는 집에 다녀왔다. (구연자의 방언을 해독하기 어려워서 일부 내용을 생략함). 여행을 마친 팔백이가 여자가 있는 산속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소나무 근처에 서 있던 어떤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노인은 저 아래 기와집에 사는 여자가 사람이 아니라 천년 묵은 여우이니 죽기 싫으면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노인은 여자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와서 밥상머리에 앉으면 얼굴에 침을 세 번 뱉어야 산다고 말한다. 노인은 명심하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팔백이게 다짐을 놓았다. 팔백이는 여자가 있는 집으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그 여자 아니었으면 나무에 올라가서 죽었을 텐데 그 여자 때문에 여태껏 살았는데,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여자를 죽일 턱이 있나.’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잔 후에 여자가 아침상을 차려 줘서 팔백이가 아침을 먹었다. 여자는 팔백이에게 물었다. “어제 오다가 무슨 말을 듣지 않았나?’ 팔백이는 “노인이 침을 세 번 뱉으라는 말을 합디다.”하고 말했다. 여자가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팔백이가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무에 매달려 죽었을 텐데, 당신 덕분에 여태 살았는데, 그 공을 생각해서 내가 당신을 죽게 할 리가 있소. 당신이 날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리시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천년 묵은 여우다. 그 영감은 산 지네이고. 그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내가 훼방 놓고, 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그가 훼방을 놓았지. 그럼, 큰 방에 가 봅시다.”
큰 방에 간 여자는 돈을 줄 테니 옷함을 하나 사 오라고 한다. 옷함이 왜 필요하냐고 묻자, 여자가 이불을 들쳤다. 이불 밑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백여우 털이 있었다. 남자가 옷함을 잘 짜서 갖다 주니깐, 여자는 “내가 오늘부터는 여우로 변하지 않고, 당신하고 백년해로하면서 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랑 살자.” 하고 말했다. 천년 묵은 여우는 사람이 되어서 팔백이와 잘 살았다.
이러한 줄거리를 지닌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는, 지네 대신에 여우가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지네각시⟩와 서사가 거의 똑같다. ⟨지네각시⟩ 유형은 전국에서 채록된 각편이 60여 편이나 되고, 변이형까지 포함하면 90편 가까운 각편이 채록되었으니, 명실상부한 한국의 전통 설화로 간주할 수 있다. ⟨지네 각시⟩의 보편적인 서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어떤 남자가 너무도 가난해서 살기 힘들어 자살하려고 산속에 들어간다. 산속에서 막 죽으려고 하는데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서 남자에게 돈을 줄 테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를 산속 기와집으로 데려가서 풍족한 삶을 살게 해 준다. 여자와 동거한 남자는 세월이 흐르자 고향에 있는 가족과 아내가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어서 (또는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와서) 고향 집을 방문한다. 자신의 가족들이 산속의 신이한 여인 덕분에 풍족하게 사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산속 여자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산속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남자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나 조상)의 모습을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함께 사는 여자가 천년 묵은 지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여자가 아침상을 가져오면 얼굴에 침(또는 담배진)을 세 번 뱉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남자는 집에 돌아오지만 자신과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여자를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침을 뱉지 못한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 천년 묵은 지네라는 사실을 밝히고, 남자가 만난 노인은 아버지(조상)가 아니라 자신의 적대자인 구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구렁이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활인(活人)의 덕을 쌓은 지네는 승천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 7-13, 639~645면)
이처럼,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는 ⟨지네각시⟩ 유형과 전체적인 서사 내용이 아주 유사하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지네각시⟩ 유형의 대단원에서는 대부분 지네가 인간 남자와 결합하지 않고 홀로 승천한다는 점이다. 이류교혼을 다룬 옛이야기의 해피엔드는 보통 결혼으로 끝나는데 반해서, ⟨지네각시⟩의 결말은 좀 독특한 편이다.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탈각을 한 지네각시는 남자의 곁을 떠나서 천상계로 가고, 홀로 남은 남자는 지상에 남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산다.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지만, 그 이별이 비극이 아니라 상생의 길로 인식되는 독특한 이야기이다. 반면에, ⟨지네각시⟩형이 변이 한 여우각시담의 결말에서 여우각시는 지네각시처럼 승천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변해서 남편과 백년해로하면서 잘 산다. 서사가 유사한 이야기에서 왜 여우각시는 지네각시처럼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 남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옛사람들이 여우는 지상계에 속하는 동물이고 지네는 천상계에 살 수 있는 동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구전 현장에서 채록된 여우각시담이 모두 해피엔드로 마무리된 것과는 달리, 1979년에 한혜숙이 구미호로 등장한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은 비극으로 끝난다. 임충이 각본을 쓴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그 이전에 문헌과 입말로 전승되었던 구미호 또는 ‘천년 묵은 여우’ 설화들과는 서사의 짜임새와 구미호 (또는 여우)의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은 전래된 설화라기보다는 새롭게 창작된 옛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국방송작가협회가 2010년에 방영된 ⟪구미호: 여우누이뎐⟫ 첫 회가 임충의 ⟨전설의 고향: 구미호⟩를 표절했다고 판정한 것도 전통 설화문학에서는 임충의 이야기와 유사한 구미호 전설을 좀처럼 찾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전설의 고향: 구미호⟩를 쓸 때 임충이 전통 설화에서 가져온 것은 무엇이고, 개인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서 창작한 것은 무엇일까? 임충의 창작옛이야기는 과연 다른 작가의 이야기로부터 빚진 것은 없는 것일까? 임충의 구미호 전설이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서 오늘날 대중문화의 주류로 탄탄하게 자리 잡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쓰기로 한다.
✽표지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법화경 그림에 그려진 여우 그림이다. 출처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제2권변상도⟫이고, 소장품 번호는 덕수 2467이다. 법화경 그림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몽둥이를 든 아이와 도망가는 여우가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본 경전을 읽고 쓰고 하는 자를 미워하면 여우로 태어나 매 맞아 죽게 된다는 내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 ⟪옥란기연⟫ ⟪삼한습유⟫ ⟪임씨삼대록⟫ 따위의 고소설에 등장하는 구미호가 요부로 변신하거나 환생해서 한 가정을 파괴하는 절대 악에 가까운 인물이다.
[2] ⟨천년 묵은 여우와 의리를 지킨 남자⟩(대계 7-2, 경북 월성군 1979);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 (대계 7-13, 대구); ⟨여우와 굼벵이의 변신⟩ (대계 4-2, 충남 대덕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