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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Dec 27. 2021

8. 임충의 창작 옛이야기 ⟨전설의 고향: 구미호⟩

2010년 7월에 방영된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는 한국방송작가협회에 의해서  임충의 ⟨전설의 고향: 구미호⟩를 일부 표절한 작품으로 판정받은 적이 있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구미호: 여우누이뎐⟫ 첫 회에 대해서 “작가의 생명은 창작에 있는 만큼 타인의 작품을 표절하는 행위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회원 모두 경각심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대본을 쓴 작가들이 ‘1년간 회원자격정지’라는 징계 처분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은 옛 전설을 차용한 것이 표절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의아심을 품었다. 그 당시 어떤 기자는 “어떤 부분이 임충 작가의 표절에 해당하는지 작가협회가 아직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민간 전설과 임충 작가의 창작 부분이 겹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어 정확한 해명이 필요하다.”라고 표절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2]. 


그 당시, 나 역시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표절 판정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번에 구미호 설화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다시금 그 당시의 표절 논란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옛사람들이 글과 입말로 남긴 이야기들 속에서 임충의 ⟨전설의 고향: 구미호⟩와 유사한 설화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면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의 판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연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타인의 표절 행위를 단죄할 수 있을 정도로, 표절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창작품인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임충이 대본을 쓰고 한혜숙이 출연한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1979년에 7월에 방영되었다. 오래전에 보기는 하였지만,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것 같아서 드라마의 영상물이나 대본을 구하려고 애써 보았다. 하지만, 1979년에 방영된 영상물이나 대본을 구할 수 없어서, 1997년 7월 7일에 납량 특집으로 방영된 임충의 ⟨전설의 고향: 구미호⟩ 대본을 참조하였다. 대본의 들머리에 수록된 줄거리를 발췌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칠복이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순진한 시골 노총각이다. 노총각에다 집은 가난하지만 효성은 지극하여 편찮으신 노모가 얼음을 띄운 콩국이 먹고 싶다고 하자 한여름에 이를 구할 방법 찾기에 부심한다. 이런 사실을 안 동네 총각들은 칠복이를 놀려 줄 요량으로 금성산 여우골에 가면 얼음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순진한 칠복이는 동네 총각들의 말만 믿고 여우골을 헤매다가 기진맥진, 폐암자에 쓰러져 있던 차에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빼먹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윽고 구미호에게 죽을 위기에 빠지나 칠복의 효심에 감복한 구미호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고 칠복을 놓아준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칠복이네 집에 묘령의 여인 정 씨가 찾아들고 칠복이와 혼례까지 치르게 된다. 세월은 흘러 딸아이까지 낳게 되었으나 미역국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칠복은 가슴이 아플 뿐이다. 이러한 때에 정 씨는 방에 사라졌다가 홀연 값진 구슬을 가지고 돌아온다. 허나 이 구슬은 오히려 칠복과 노모의 품성을 나쁘게 변화시키고 재물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빠져 가정의 화목은 산산이 부서진다. 칠복은 투전판에 끼어들기까지 하고 더 많은 구슬을 정 씨에게 요구한다. 어느 날 강압에 못 이겨 구슬을 구하러 나갔던 정 씨는 무사의 화살에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오고 칠복은 과거를 뉘우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다시 세월이 뛰어 정 씨가 나타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즈음, 이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칠복은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정 씨와 정담을 나누던 중 여우골에 가서 구미호를 봤던 얘기를 무심코 꺼낸다. 이때 갑자기 백발의 구미호로 변해 가는 정 씨! 정 씨는 사실 칠복이가 십 년 간만 비밀을 지키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구미호였던 것이다! 인간의 언약 불이행으로 인해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구미호는 분노하며 두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다.



임충의 ⟨구미호⟩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펴본 옛사람들의 구미호 설화와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많이 다르다. 남자가 효도를 구실 삼아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구한 것, 여우구슬이 등장한 것, 여우 각시 덕분에 남자의 집안 형편이 좋아진 것, 언약을 지키지 못한 남자에 대한 복수, 무사와 구미호의 싸움 따위의 모티프는 앞에서 살펴본 ⟨금강산의 괴호⟩나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서사의 뼈대를 구성하는 다른 화소들은 옛 구미호(여우) 설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남자가 산속에 쓰러져 있다가 구미호가 간을 빼먹는 장면을 목격한 것, 구미호가 남자에게 자신을 봤다는 걸 평생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금기를 부여한 것,  남편의 도박으로 여우 아내가 고통받는 것, 세월이 흐르자 남편이 금기를 깬 것, 탈각을 하루 앞두고 구미호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 구미호가 아이와 함께 사라지는 것 따위는 옛 구미호 설화나 고전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소들이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결말 부분도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 유형의 여우각시담과  많이 다르다. 이 유형의 설화 세 편에서 여우 각시는 모두 남편이 신의를 지킨 덕분에 사람으로 변해서 백년해로한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대단원은 여우각시담이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이류교혼담(異類交婚談)인 ⟨선녀와 나무꾼⟩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류(異類)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떠나는 모티프는 주로 ⟨선녀와 나무꾼⟩ 유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녀와 나무꾼⟩은 선녀가 날개옷을 찾은 이후에 펼쳐지는 사건에 따라서 선녀승천형, 나무꾼승천형, 천상시련극복형, 수탉유래형 등 다양한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 모든 유형에서 선녀는 승천할 때 자신의 아이를 모두 데리고 떠난다.  특히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대단원은 나무꾼이 아내와 자식을 잃고 지상에 영원히 홀로 남는 선녀승천형과 유사하다. 


구미호가 부여한 금기를 남편이 지키지 못해서 이류 교혼이 파국으로 끝난다는 설정도 ⟨선녀와 나무꾼⟩을 떠올리게 한다 [3].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서는 사슴(또는 노루)과 선녀가 나무꾼에게 다양한 금기를 부여한다. 사슴이 나무꾼에게 부여한 대표적인 금기는 ‘아이 셋 이상을 낳기 전까지는 날개옷을 보이지(주지) 말라’는 것이지만,  일부 각편에서는 승천하는 방법이나 결혼 경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금언(禁言) 금기도 등장한다. 선녀는 어머니(또는 형제)를 만나러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이동하는 나무꾼에게 ‘말에서 내리지 말라’ ‘지상의 음식을 먹지 말라’ ‘승천 시간에 늦지 말라’ 따위의 금기를 부여한다. 그러한 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무꾼은 자신의 가족과 이별한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대중 심리 속으로 쉽사리 파고들어서 지난 40년간 다양한 매체로 급속하게 확대‧재생산된 이유 중의 하나도 구미호라는 캐릭터가 ⟨선녀와 나무꾼⟩에서 끌어온 다양한 모티프들과 하나로 잘 어우러져서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표절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은 한국의 전통 설화에서만 모티프를 차용해서 창작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라프카디오 헌의 ⟪괴담⟫에 수록된 ⟨설녀⟩와 아주 비슷하다. 구미호 설화를 연구한 국문학자 이명현과 일문학자 노성환은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스토리라인이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괴담⟫ 속의 단편 ⟨설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1964년에 제작한  ⟪괴담⟫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아일랜드 작가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일본 이름: 小泉 八雲)이 1904에 집필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명현은 ⟨설화 스토리텔링을 통한 구미호 이야기의 재창조⟩(2012)란 논문[4]에 달린 각주에서, 영화 ⟨설녀⟩가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이야기 줄거리와 장면 구성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보았다(36면). 일문학자 노성환은 이명현의 논의를 확장해서 ⟨전설의 고향: 구미호⟩와 ⟨설녀⟩의 유사성을 상세하게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5]. 한일 양국의 두 설화를 비교한 후, 노성환은 “일본의 설녀가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건너와 구미호로 재탄생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한다(280).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라프카디오 헌의 ⟨설녀⟩에 영향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헌의 작품이 과연 '일본의 설녀'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헌의 ⟨설녀⟩는, 임충의 ⟨구미호⟩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전통 설화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상상력과 다양한 국가의 설화가 혼합된 창작옛이야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이어 쓰기로 한다. 



[1] ⟪해럴드경제⟫, 서병기, ⟨’여우누이뎐’, 어떤 부분이 표절인지?⟩ 2010년 10월 11일.

[2] 같은 글에서 인용.

[3]배원룡, ⟨나무꾼과 선녀 설화의 연구⟩, 성균관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1.

[4] 이명현, ⟨설화 스토리텔링을 통한 구미호 이야기의 재창조* —드라마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 나타난 주체와 타자를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12년 봄, 35-56

[5] 노성환, ⟨한국의 구미호와 일본의 설녀⟩, ⟪일어일문학⟫ 72집, 2016, 27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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