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의 하얀말⟫: 아카바 수에키치의 예술혼

by 김환희

문자와 그림이 하나로 어우러진 좋은 어린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그림책의 속말'이 조금씩 들린다는 것이다. 문자로만 이루어진 책을 주로 읽어 왔던 내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어 어린이 그림책의 속말들을 들으면서 기쁨과 슬픔을 절절이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몇 년 전만 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어린이가 그림책을 보고 느끼는 감동과 어른인 내가 그림책을 보고 느끼는 감동은 많이 다를 것이다. 천진한 어린이와는 달리 내가 어느 특정 그림책에 이끌리는 것은 내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축적된 인생체험과 기억이 그림책의 속말들과 맞물려서 내면에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지 내가 새삼 순진무구한 동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한림출판사, 2002)란 책에서 마쓰이 다다시는 "어른 자신이 먼저 공감하고 감동한 그림책을 어린이에게 읽어주면 신통하게도 듣는 어린이 역시 그 그림책에 큰 관심을 갖습니다. 아마도 읽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어 어린이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겠지요"라고 말한다 (25쪽). 나 역시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종종 깨닫는 사실은 내가 깊은 감명을 받은 책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학생들도 이심전심으로 그 책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른이 공감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면서 머릿속으로만 어린이 교육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서 억지로 가르친 책이 어린이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아카바 수에키치(赤羽末吉)의 ⟪수호의 하얀말⟫은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좋아하고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책이다.


⟪수호의 하얀말⟫ (한림출판사, 2001년)은 몽골의 대표적인 악기 마두금(馬頭琴)의 유래에 얽힌 전설을 그림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가난하고 부지런한 양치기 소년 수호는 어느 날 저녁 초원에 버려진 하얀 망아지를 안고 집에 온다. 수호는 정성 들여 망아지를 돌보고, 망아지도 늑대와 용감히 싸우면서 양들을 지킬 정도로 수호를 돕는다. 몇 년 뒤 청년이 다 된 수호는 친왕이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포상으로 내건 말타기 대회에 참가한다. 수호는 우승을 하지만 양치기를 얕잡아 본 친왕에게 말만 빼앗긴 채 초주검이 될 정도로 매를 맞고 친구의 등에 업혀 집에 온다.¹ 하지만 수호의 하얀말은 친왕을 내동댕이치고 쏟아지는 관군의 화살을 맞으며 수호의 품으로 돌아와 죽는다. 사랑하는 말이 억울하게 죽은 후 단장의 슬픔에 젖어 있는 수호의 꿈속에 나타난 하얀말은 자신의 시신으로 악기를 만들라고 말한다. 수호는 말의 지시대로 마두금을 만든 후 악사가 되어 초원을 떠돈다. 말과 뛰어놀았던 옛 시절을 추억하며 슬픔을 달래는 수호의 마두금 소리는 초원에 은은히 퍼져 나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대략 이러한 줄거리를 지닌 몽골 전설은 아카바 수에키치의 그림책 속에서 23개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빨간색의 몽골 전통 의상 델을 입은 강렬한 눈매의 소년이 엷은 갈색 톤의 초원에 서서 하얀 망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앞표지를 넘기면 마두금 악기가 보이고 몽골의 다양한 이국적 풍경이 하나씩 펼쳐진다. 세로보다 가로가 훨씬 긴 판형으로 된 책의 양면이 한 장면을 구성하면서 몽골 초원의 광활한 풍경과 수호의 내면세계가 불필요한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된 채 차분한 느낌을 주는 다양한 색조로 펼쳐진다. 황토색과 갈색이 주된 색조를 이루며 펼쳐지는 몽골의 초원은 시야가 탁 트여 하늘과 땅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지평선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광활하다. 때로는 짙은 황토색과 갈색 구름이 맞닿는 지평선 위에 화려한 색깔의 무지개가 떠오르고, 때로는 밝은 황토색의 땅과 살색의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초원을 수호가 맨발로 안장도 없이 하얀말을 타고 역동적으로 질주한다. 그러한 정경을 볼 때는 수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내 자신이 마치 몽골의 초원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후련해진다.

IMG_8640.jpg 출처 ⟪수호의 하얀말⟫, 아카바 수에키치 그림/오츠카 유우조 글, 이영준 옮김, 한림출판사, 2001

하지만 ⟪수호의 하얀말⟫이 보여주는 것이 몽골 초원이 지니는 광활함과 유목민의 역동성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림책은 수호의 내면세계를 차분한 느낌의 다양한 색채로 섬세하게 형상화해 보여준다. 광활한 초원의 삶에 익숙한 수호가 말타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화려한 도시에 왔을 때 느꼈을 위화감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빼곡히 들어선 하얀색의 건물들과 밝은 빛의 땅으로 표현된다. 초원에 버려진 하얀 망아지를 키우면서 수호의 마음에 싹트는 동물에 대한 형제애는 오렌지색 들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옅은 붉은빛의 들판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말타기 대회에서 수호와 하얀말이 경주를 할 때 느끼는 열기와 긴박감은 공간적인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된 채 땀의 축축함이 느껴지는 듯한 물기 어린 붉은색으로 표현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수호가 느꼈을 여러 고통스러운 감정들--친왕의 횡포 앞에서 느꼈을 공포감, 말타기 대회에서 우승하고도 포상은커녕 말만 뺏기고 관군에게 부당하게 매를 맞았을 때 느꼈을 참담함, 사랑하는 말을 잃고 초주검이 되어 자신의 겔(몽골의 이동식 집)에 누워있을 때의 절망감, 관군의 화살 때문에 입은 상처로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말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꼈을 비통함--은 암울한 느낌을 주는 무채색과 코발트색의 화면으로 담담하게 표현된다.


또한 꿈속에서 하얀말과 재회하면서 수호가 느꼈을 행복감은 살구빛 배경화면에 하얀 말, 빨간 델, 초록빛 바지, 오렌지색 꽃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이 외에도 마두금을 연주하는 동안 수호와 청중과 하얀말이 음악을 통해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너와 나의 경계를 초월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는 자줏빛 배경 속에 놓인 유령 같은 하얀 형상들로, 또 지배집단의 횡포와 삶의 무게에 지친 몽골 민중이 마두금 소리를 위안삼아 피로를 잊는 고즈넉한 저녁은 튀지 않는 어두운 갈색 배경에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무지개 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된다. 이처럼 ⟪수호의 하얀말⟫을 구성하는 그림들은 독자로 하여금 때로는 황량하고, 때로는 역동적이고,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게 만든다. 책갈피를 넘기면서 잔잔하게 펼쳐지는 스물세 개의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귓가에도 몽골 유목민들의 슬픔과 시름을 달래주던 마두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수호의 하얀말 장면.jpg 출처 ⟪수호의 하얀말⟫, 아카바 수에키치 그림/ 오츠카 유우조 글, 이영준 옮김, 한림출판사, 2001

특히 이 그림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적대관계에 있는 두 인물--수호와 친왕--의 복장이 보이는 대조성이다. 그림책 전체를 통해 수호는 빨강과 초록이 조화를 이루는 서민적인 몽골 복장을 입고 맨발로 등장한다. 빨간색 웃옷(델)과 모자는 열정과 패기를, 초록색 바지와 허리띠(부스)는 생명과 젊음을, 맨발은 가난과 자연성을 동시에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친왕과 관군은 어두운 무채색 위주의 청나라 전통복장을 입고 있고 목이 긴 승마용 신발(고탈)을 신고 있다. 이러한 복장의 차이는 그림책 속의 글이나 ⟪몽골구비설화⟫에 수록된 <마두금> 전설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항들이다. 마두금 음악을 칭기즈칸이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만큼 마두금의 기원은 13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바 수에키치는 수호에게 횡포를 가하는 친왕과 관군의 변발과 복장을 옛 몽골식 스타일이 아닌 전통적인 청나라 스타일로 묘사하고 있다. 칭기즈칸이나 쿠빌라이 칸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옛 몽골인들의 변발은 머리를 양 옆으로 땋은 개체 변발인데 그림책 속의 친왕과 관군은 체두변발을 하고 있고 그들이 입은 복장도 옛 몽골인들의 것과는 다른 전통적인 청나라 복장이다.² 아카바 수에키치가 수호와 친왕의 관계를 몽골과 중국의 관계로 치환해서 해석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내몽골과 중국의 역사적인 정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림출판사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출판사 리뷰>를 보면 아카바 수에키치가 ⟪수호의 하얀말⟫을 그리게 된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칭기즈칸 묘의 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몽골을 취재하다가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의 가묘가 내몽골에 있고 ⟪수호의 하얀말⟫이 내몽골에서 채록된 구비전설 <마두금>과 그 서사적 구조가 동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림에서 피지배집단에 속하는 수호가 몽골 복장을 입고 있고 지배집단에 속하는 친왕과 관군이 청나라 복장을 한 것은 내몽골의 서글픈 근대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24년에 독립국가를 형성한 외몽골(몽골리아)과는 달리 중국의 한 자치구로 존속하는 내몽골에서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소수 집단으로 전락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카바 수에키치의 마음속엔 인류의 흥망성쇠에 대한 착잡한 상념이 떠올랐을 것이다. 과거에 유라시아 대륙을 질주하면서 세계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유목민들이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수동적인 정착민으로 변해가는 내몽골에 있어서 친왕에게 부당하게 말을 빼앗긴 수호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아카바 수에키치는 1961년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그림책 작가로 데뷔한 후에 일여 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수호의 하얀말⟫을 발표하였는 데,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의 반응이 굉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카바 수에키치 자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광활한 대륙을 정확히 표현해 내지 못한 아쉬움으로 그 후 약 7년 여 간의 재작업을 통하여 완벽한 몽골의 초원을 재현"하였다고 한다.³ 1980년 아카바 수에키치는 ⟪수호의 하얀말⟫로 어린이 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안데르센 상을 받게 된다. 1967년에 재출간된 ⟪수호의 하얀말⟫은 삼십 년이 지난 1997년에는 80쇄를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쉰 살을 넘긴 나이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몽골의 전설 한 편을 그림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근 8년이란 긴 세월을 바친 아카바 수에키치의 치열한 예술혼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본의 그림책과 어린이 문학이 오늘날 뛰어난 예술성과 세계성을 지니게 된 데에는 아카바 수에키치와 같은 투철한 '작가 정신'을 지닌 예술가와, 그들의 기나긴 작업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 온 <후쿠잉캉> 출판사의 마쓰이 다다시 회장 같은 후원자와, 그들의 작업을 이해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¹ 영주는 일본 원서에는 "とのさま"로, ⟪몽골구비설화⟫라는 책에는 친왕(親王)으로, 우리나라 번역서에는 원님으로 되어 있다. 내 생각에는 ⟪몽골구비설화⟫에 번역되어 있는 대로 친왕으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몽골구비설화⟫(백산자료원, 1999)을 번역한 주채혁 교수의 말에 의하면, 친왕은 "황제가 王爵으로 봉한 王을 높여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468쪽).


² 몽골족[蒙古族]은 '개체(開剃)변발'이라 하여, 앞머리와 좌우 양쪽 머리를 남기어 양쪽 귀 뒤에 2가닥으로 땋아 늘였다. 만주족은 후두부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의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남은 후두부의 모발을 1가닥으로 딴 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여진족도 만주족과 같은 변발이었다. 금(여진족)과 원(몽골족)의 지배를 받은 한민족도 변발을 했는데, 특히 청은 철저하게 강요하였다. 중국을 정복하고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정한 청의 세조(世祖)는 1644년 체두변발령(剃頭髮令), 즉 치발령(髮令)을 내려 전 중국민에게 만주족의 두발형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변발은 청대를 통하여 일반적인 풍속으로 굳어졌다.--<변발>, <두산세계백과사전>


³ 한림출판사의 <출판사 리뷰> https://www.hollym.co.kr/hollym-book/2387#book-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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