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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Sep 12. 2023

밀양의 얼굴, 영남루는 경쾌하다.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밀양편 3

  

밀양을 대표하는 인물이 사명대사, 밀양의 대표 사찰이 표충사라면 밀양의 대표 전통 건축물은 무엇일까요? 단연코 밀양의 자랑이자 얼굴인 영남루입니다. 영남루는 조선시대에도 이미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마천루가 즐비한 현대의 건축물 사이에서도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눈을 뗄 수 없는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영남루와 같은 건물을 '누각'이라 부릅니다. 지난 글 ‘경북 봉화 편’에서 청암정, 한수정 같은 스타급 '정자'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누각과 정자는 우리 전통 건축의 백미라 불립니다. 사계절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지요. 그래서 대부분 문과 벽이 없습니다. 누각과 정자는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자연으로 향하게 합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서양 건축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의 자리를 자연에 기꺼이 내어주지요.


누각과 정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마루의 유무입니다. 누마루가 있는 것이 누각입니다. 그래서 누각은 단층인 정자와 달리 2층 건물 형태를 띱니다. 장방형·육각형·팔각형 등의 평면구조를 가지고 있는 정자는 개인을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누각의 평면구조는 주로 장방형이며 정자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큽니다. 궁궐이나 관아, 성곽, 사찰, 서원 등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놀이를 위해 짓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 무엇일까요? 전면 7칸, 측면 5칸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단일 목조 건축물 중 부피가 가장 큰 경복궁 내 경회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목재 여건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7년(고종 4)에 재건한 경회루는 유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건축물입니다.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정학순, 1865)는 1층 내부 돌기둥을 원통형으로 외부 돌기둥을 사각으로 한 것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또 2층 누마루의 나무기둥은 3겹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장 안쪽 3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이 3칸을 둘러싼 8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그리고 중간과 가장 바깥의 기둥은 12달, 24 절기, 24방(方)을 상징한다고 하니 누각 하나에 세계 아니 우주를 담았습니다.


2020년 미국 NBC 인기 프로그램인 ‘지미 팰런쇼’에 선보인 경회루의 야경은 황홀했지요. BTS가 ‘소우주’를 불렀는데요, 경회루가 우주를 담은 건물이란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자, 조선 최대의 누각인 경회루를 보았으니 다시 밀양 영남루로 돌아가 볼까요? 임금이 사는 궁궐 안에 지은 경회루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그 웅장함과 주변 자연경관과의 조화로움으로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 누각이 바로 밀양 영남루입니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폐사되자 1365년(고려 공민왕 14) 밀양군수 김주가 새로 누각을 짓고 영남루라 부른 것이 시초입니다. 아쉽지만 지금의 영남루가 이때 지어진 누각은 아니지요. 조선시대에 들어와 넓혀 지었고 화재로 훼손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1844년(헌종 10)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목조건물의 특성상 화재로 사라지고 중건되기를 되풀이했지만 밀양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부심이 잿더미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영남루는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 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는 건물로 사용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경회루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큰 누각입니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 간격도 넓어 같은 칸수를 가진 진주의 촉석루에 비해서도 더 커 보입니다. 게다가 날개를 단 듯 양옆으로 건물을 거느리고 있어 매우 웅장하지요.       


누각이 세워진 입지 조건도 압권입니다. 경쾌하게 흘러가는 밀양강을 끼고 절벽 위에 세워진 영남루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이거니와 시원한 강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쳐 여름 내내 뜨거운 햇살을 피해 땀을 식히려는 시민들로 북적입니다.           


밀양강변 절벽 위에 세워진 영남루의 자태가 매우 웅장하고도 우아합니다.


좀 더 자세히 영남루를 들여다볼까요? 능파각, 침류각이라는 이름의 두 건물이 누각의 날개처럼 양쪽에 매달려 있습니다. 능파각은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루 1칸에 온돌방 2칸을 들여놔 영남루와 연결했지요. 침류각과 연결된 월랑(月廊)은 가파른 층층 계단으로 그 위에 겹겹이 얹은 지붕이 무척 이색적입니다. 밀양강 물결처럼, 혹은 밀양의 노래 ‘밀양아리랑’처럼 율동적이고도 경쾌하지요.     

 

양 옆 건물들까지 한 컷에 다 담기도 어려운 대단한 규모입니다. 영남루와 서쪽의 침류각은 층층 계단식 월랑으로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누마루 위로 올라섭니다. '와~~~ 시원하다!'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람이 누마루 사방을 휘젓고 다니니 도무지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바깥 풍광을 바라보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매끌거리는 나무 기둥에 손을 얹으면 선인들의 두런대는 소리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호화로운 내부의 목조각과 단청 장식이 눈길을 끕니다. 영남루를 스쳐간 명사들이 남긴 수많은 편액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거대한 대들보에 걸린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편액은 힘찬 글씨체로 인해 단연 돋보일 뿐 아니라 밀양 사람들의 영남루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는 밀양부사 이인재의 큰아들이 11살에, '영남루((嶺南樓)'는 둘째 아들이 7살에 썼다니 놀랍습니다.


이제 영남루 아래 강변으로 내려가봅니다. 대나무 숲 사이에 영남루만큼이나 오래도록 밀양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여인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아담한 전각 하나를 만납니다. 전설 속의 여인, 아랑을 모신 ‘아랑사(阿娘祠)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중략)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哀話)가 전해 있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경쾌함과 명랑함이 물씬 묻어나는 흥겨운 노래 밀양아리랑에 등장하는 아랑, 그녀의 슬픈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아랑은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로 윤정옥 혹은 동옥이라 전합니다. 재기 넘치고 아름다웠던 열여섯의 아랑은 어느 날 저녁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관청 심부름꾼인 주기가 겁탈하려 하자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켰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후 밀양에 신임부사가 부임할 때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는데, 담력이 센 신임부사 이상사가 부임하고 아랑의 원혼을 만납니다.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된 부사는 유모와 주기를 처형해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지요.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밀양시에서는 매년 4월 16일에 아랑규수를 선발해 제향을 올린다고 하니 아랑에 대한 밀양사람들의 사랑이 대단합니다!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아랑사입니다.아랑사 내부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지요. 그런데 아랑을 그린 김은호 화백이 친일 화가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지요~

                                                                                                        

이제는 영남루와 어깨를 견줄 만한 누각들은 어떤 것이 있나 슬슬 궁금해지지요?^^ 진주의 촉석루와 남원의 광한루, 삼척의 죽서루,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 등 전국적으로 아름답기로 소문난 누각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중 강을 끼고 높은 절벽 위에 세운 입지 조건이나 5⨯4칸이라는 건물의 크기 등이 영남루와 무척 닮아 항상 비교 대상이 되어온 경남 진주의 촉석루를 한번 볼까요? 당사자들이 원치 않아도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서로 비교하며 우월을 가리는 것을 좋아하지요. 어쩌면 영남루와 촉석루도 늘 비교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밀양으로의 두 번째 답사는 진주 촉석루에 먼저 들렀다 밀양으로 향하는 일정으로 정합니다.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지요. 촉석루의 잔상을 머릿속에 그려두고 영남루를 다시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고고하게 남강을 내려다보며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矗石樓)는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는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건물로 진주의 자랑거리로 오래도록 사랑받아왔지요. 1241년(고려 고종 28) 창건된 이래 중건을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8년(광해군 10)에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지만 안타깝게도 6·25 전쟁으로 불타버렸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진주 시민의 성금을 보태어 원형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지요.      


하지만 재건된 촉석루는 오랜 역사성과 국난극복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국보의 지위를 잃습니다. 진주시민들이 국보환원운동을 전개했지만 문화재청은 4개 부속누각 부재, 가공된 주춧돌, 원형이 훼손된 돌기둥, 건축물의 연륜 등을 들어 환원 불가 판정을 내린 바 있지요.

                                                                                                 

촉석루의 전제적인 전망을 보기 위해서는 강 건너편으로 건너와 절벽 위 우람한 촉석루를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옛 촉석루와 지금의 촉석루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비탈 경사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기둥 높이를  조절한 1층 나무기둥이 안타깝게도 천편일률적인 돌기둥으로 복원되었군요-.-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첫 번째 전투가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2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던 왜군은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 아래 군관민이 합세해 치열하게 저항하는 진주성을 함락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진주성에서의 싸움을 설욕하기 위해 이듬해 재차 진주성을 공격, 성은 함락되고 군관민 6만 명이 희생되지요. 이때 관기 논개가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촉석루 바로 옆에 의기사(義妓祀)라는 사당이 지어지고, 촉석루 아래 남강 강변 바위 위에 ‘의암(義巖)’이라 새겨 논개의 충절과 기개를 기리고 있지요.


논개를 모신 의기사와 의암입니다. 친일화가 김은호화백이 그린 논개의 영정은 2008년 새로운 그림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진주를 떠나 다시 밀양으로 돌아옵니다. 영남루 앞에 서서 두 누각을 비교하느라  머릿속은 바빠지지요. 크기부터 형태, 입지, 자연경관까지 너무나 닮은 두 누각에서 의외의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촉석루에 의기사가 있듯 영남루에는 아랑사가 있습니다. 충절과 정절을 상징하는 조선의 두 여인, 논개와 아랑의 아담한 사당이 두 거대한 누각을 떠받치듯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람한 누각이 가냘픈 두 여인에게 기댄 듯한 기이한 느낌마저 듭니다.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가 확고한 조선 사회에서 여인으로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 그녀들이지만 정작 죽어서는 그 모든 것을 떠안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입니다.


조선사회가 그녀들을 위인으로 받든 것은 충절과 정절을 지키는 삶이 여인으로서 최고의 가치로운 삶이라는 교훈을 후대에 남겨주기 위해서였을까요? 하지만 정작 고달팠을 이 땅의 옛 여인들이 바라던 삶은 어쩌면 조선사회가 고귀하게 여기는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복잡한 인간사에는 관심없다는 듯 밀양강과 남강은 경쾌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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