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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r 02. 2022

가장 많은 일기를 남긴 기록의 달인

혼자라 좋은, 시골 인문학여행 - 담양편 1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은 양의 개인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일기라고 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있겠지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방대한 양의 일기를 매일같이 쓴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아닌 약 500여 년 전 선조 임금의 경연관이었던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입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行秘書)’이라 칭송받은 당나라 학자 우세남(虞世南)에 비견되며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글 귀신(書中鬼)’이라 불리었던 박학다식한 대학자 미암 유희춘은 11년간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11권의 일기로 인해 지금도 ‘기록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습니다. 유희춘이 19년간의 긴 유배에서 돌아와, 관직을 다시 시작한 해인 1567년 10월 1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577년 5월 13일까지를 기록한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원래 모두 14권이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11권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사실 많이도 불타버려 전해지는 것이 적습니다. 임란 전의 개인 일기 중에서는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더불어 권벌의 『충재일기』, 권문해의 『권문해 초간일기』가 남아있는 정도입니다. 이들의 일기는 임란 이전 관료가 직접 쓴 자필일기로써 전쟁으로 소실된 사료를 보완하는 데 활용된 매우 중요한 기록들입니다. 게다가 독자를 의식한 글이 아닌 솔직하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세세하게 기록된 지역 명소, 풍속, 교유관계, 소소한 일상 등은 요즘 들어 주목받는 미시사(微示史), 일상사(日常史)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미암 유희춘은 1513년 전남 해남의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암(眉巖)이란 호는 그가 살던 집 뒤, 금강산 중턱쯤 눈썹바위라 부르는 ‘미암바위’가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라 전합니다. 김안국과 최산두의 문인이며, 『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유명한 최부(崔溥, 1454~1504)가 그의 외조부입니다. 『표해록』은 제주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국 절강 연안에 표착, 중국 각지를 거치고 압록강을 건너 마침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일어난 일을 기록한 책으로, 15세기 중국 강남지방과 산동지방을 생생하게 기록한 견문록입니다. 소설 『15 소년 표류기』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지는 이 책은 성종 연간에 처음 간행되었고 외손자인 유희춘이 교정 후 중간본을 간행하고 그 후 삼간본과 사간본을 거쳐 오늘에 이릅니다.     


유희춘은 1538년(중종 39)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9년간 먼 변방인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을사사화(乙巳士禍)와 관련이 깊습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경원대군(명종)이 즉위합니다.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세력이 커진 외척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일파는 역모를 씌워 인종의 외척인 윤임을 비롯한 대윤(大尹) 세력을 대거 숙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지요. 2년 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발견된 ‘위로는 여주(女主)가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의 벽서가 임금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을사사화 때의 화근을 남겨 둔 탓이라며 소윤 일파는 남은 반대파마저  숙청합니다. 이때 을사사화 당시 윤임 일파 제거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20여 명의 사림이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중 사람이 유희춘입니다.    

   

유희춘은 근 20년간의 긴 귀양살이 중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속몽구(續蒙求)』와 『육서부록(六書附錄)』과 같은 책을 짓고 후학을 길러, 그로 인해 글을 아는 사람이 적은 국경지방에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었고 학문이 해박하다는 이유로 정 5품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관이 됩니다. 선조는 그를 일러 ‘경적(經籍)을 널리 보아 학술이 정치(精緻)하고 세밀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왕이 인정한 대학자였던 셈이지요. 


긴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한양에서 뒤늦은 벼슬살이를 시작한 그는 그 후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 그러나 1577년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자마자 병으로 드러눕게 된 그는 5월 11일에 겨우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던 그는,     


신이 먼 길을 달려왔더니 피로와 열이 크게 발하여 음식을 들지 못하니 며칠 사이에 회복될 형편이 아닙니다.

경연의 중요한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으니 지극히 황송하고 민망합니다. 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갈아주소서.

 

라고 적었습니다. 이 날로부터 병이 위중해져 나흘 뒤인 5월 15일 64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을 시작하고 세상을 등지기 직전까지 11년간 계속된 그의 일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방대한 분량의 일기로 기록되게 됩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조정의 공적인 사무에서부터 아주 개인적인 일까지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경연관으로서 강론 내용, 조정의 동태, 관직의 수행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임란 후 불타버린 『승정원일기』를 대신해 『선조실록』의 사료로 활용되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미암일기』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미암일기』의 또 다른 가치는 16세기 훈구파에 대항해 조선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아가는 지방 사림(士林)의 일상생활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희춘의 일기를 읽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일기 속에서는 조선 중기(17세기 후반) 이후 유교적 틀과 질서 속에서 정의되어 온 가부장적인 가족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희춘은 24세에 16세의 송종개와 혼인합니다. 두 사람은 혼인 후에도 유희춘은 자신이 나고 자란 해남에서, 부인은 친정인 담양에서 친정 부모와 함께 지냅니다. 혼인 한지 2년 만에 유희춘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지만 부인은 여전히 친정인 담양에서 지냅니다. 그러다 유희춘이 35세 때부터는 20여 년간 함경도 종성에서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되어 자연스레 별거하게 되니 실제로 부부가 함께 산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유희춘의 딸인 ‘은우어미’는 결혼 후에도 줄곧 유희춘 내외와 함께 친정에 살며 딸 은우를 양육하는데 부모의 도움을 받습니다. 유희춘의 외아들 유경렴은 혼인하여 처가로 가 살면서 이런저런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본가로 왕래합니다. 유희춘 자신도 해남의 외가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시에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가들기’와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의 출산과 양육이 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습, 아들과 딸의 구별 없이 부모를 봉양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모습, 부모가 죽고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도 아들과 딸에 차별을 두지 않는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조선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충격을 받습니다. 필요에 따라 부부가 따로 살다 또 합치고, 부부가 양가 부모를 모두 봉양하는데 이견이 없으며, 아들 딸 구분 없이 양육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모습 등은 현대보다 더 현대적인 가족의 모습이어서 흥미롭습니다. 지금 우리의 가족 개념은 17세기 이후로 변화된 개념, 곧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부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16세기까지만 해도 부계만이 아니라 어머니 쪽의 모계, 처가 쪽의 처계까지를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교가 뿌리내리기 전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임을 그의 일기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미암일기』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많은 인물들에 있습니다. 주인공인 유희춘이 있고 그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역할과 성격이 잘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해나가는 소설과도 같이 서사 구조가 매우 탄탄합니다.


그의 가족, 특히 부인 덕봉 송종개를 비롯하여 그와 절친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 허봉·허균 형제와 허준 등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그저 무심한 듯 일기에 등장하고 있어 우리에게 놀라움과 동시에 읽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걸쭉한 인물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보다 더 재미를 주는 인물들은 바로, 집안 각 분야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노비, 이웃 사람, 지방의 벼슬아치, 기녀 등 다양합니다. 평범한 그들의 일상적 삶은 그들의 이름과 함께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방대한 양의 일기장,『미암일기(眉巖日記)』입니다. (유희춘 저, 필사본 11 책, 보물 260호, 미암박물관 소장)


다음 글에서 유희춘의 일기에 등장하는 놀라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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